‘극단적 주장’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것도 언론의 책무
‘음모론 성 주장’ 보도하거나, ‘기계적 양비론’에 빠진 언론들 반성해야
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인지 결정하는 과정’
‘디지스트신문 DNA’는 그 토론 과정을 멈추지 않을 것…
얼마 전 인터뷰 차 만난 모 국회의원이 내게 언론의 역할을 꼬집었다. 아니, 언론인에 공감하며 사회를 비관했다. 예전에는 언론이 극단적 주장에 비중을 둬서 국민에게 전하지 않겠다는 책임감을 가졌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1인 미디어와 SNS가 발달하며, 극단적 목소리가 모두 전해진단다. 언론의 노력이 무색해졌다. 이 현상이 우리 사회를 좀먹는다는 그의 논리에 공감했다.
최근 뉴스에서 ‘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인지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 하버트 갠스의 표현을 인상 깊게 봤다. 기자라면 시민보다 앞서 ‘사실’을 취재하고 이를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 기계적인 양비론에 빠지거나, 조회수를 위한 극단적 주장을 책임 없이 떠벌리면 안 된다.
앞서 언급했던 모 국회의원은 현 정치 사회의 문제를 ‘극단적 목소리가 극단적 지지층에게 활발히 전달되고, 그렇기에 극단적인 논리를 펴는 정치인이 성장하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극단적 목소리를 배제하고 건전한 토론을 전해 독자가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 언론의 역할인데, 과연 잘 지켜지고 있는가?
찔리는 기자 몇 있을 것이다. 여러 해 전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음모론적 주장을 정상적인 것인 양 보도한 한겨레나, 지난해 있었던 친위 쿠데타에 양비론적 주장을 지속한 조선일보나 모두 찔려야 한다. 나와 ‘디지스트신문 DNA’도 알게 모르게 저런 보도를 했던 적은 없었을지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종종 기삿거리가 있다며 들고 오는 친한 후배 기자가 한 명 있다. 패기 넘치는 1년 차 기자의 눈에 보인 기삿거리는 대게 비판거리다. ‘최근 학교의 정책 수립 과정 중 학생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라는 형태의 주장이 많다. 취재 중 학교본부 구성원을 많이 마주치며 ‘수구화’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그의 비판점 중 잘못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종종 혼냈다.
“너 그거 ‘비판을 위한 비판’ 아니냐? 비판 속에 논리 구조가 없다. 근거를 찾거든 다시 가져와라.”
“비판하기 전에 저 사람은 왜 저런 판단을 했을지 백번 생각하고, 그래도 문제면 그때 비판해라”
생각해 보면 그 1년 차 기자의 잘못이 아니다. 나도 수습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매번 같은 내용으로 혼났다. 아마 이 친구도 몇 년 후 자신의 후배들에게 나와 똑같은 소리 하는 ‘꼰대 선배’가 돼 있을 것이다. 그 기자와 나는 ‘무엇이 뉴스인지’ 결정하기 위해 토론하는 것이다. 이 토론이 죽으면 안 된다. 양쪽 목소리가 모두 필요하다.
나와 ‘디지스트신문 DNA’의 기자들은 그 고민을 멈추지 않겠다. 무엇이 뉴스 감인지 최선을 다해 토론하겠다. 무비판보다 나쁜 대책 없는 ‘찡찡거림’이 아닌지, 잘못의 실체 위에 물타기를 얹는 ‘기계적 양비론’이 아닌지 꾸준히 생각하겠다.
나는 어차피 곧 졸업하고 학보사 사무실을 떠날 고학번 기자이다. 그저 DGIST 내 건강한 공론의 장이 들어서는데 우리의 뉴스가 본연의 역할을 이어 가길, 꼰대 전 편집장으로서 후배 기자들에게 바랄 뿐이다.

권대현 기자 seromdh@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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