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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 기자의 ‘그림’일기] “딸깍”하면 다 되는 세상에서, 내 그림이 의미 있나요?

오피니언

2025. 5. 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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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스트신문 DNA 기자들이 취재 현장 안팎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자 OO일기’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OO일기’는 지난 2020년 배현주 전 편집장이 원내 익명성에 대해 고찰한 ‘꼰대 일기’ 칼럼에 영감을 받은 후배 기자들이 선배의 뜻을 이어받아 비정기적으로 ‘일기’ 칼럼들을 발행하며 출발했습니다앞으로 디지스트신문 DNA는 사소하고 즐거운 이야기부터 진지한 주제까지취재 현장 안팎에서 보이는 다양한 이야기에 대해 자유롭고 넓은 범위로 기자의 경험과 생각을 전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때로는 가벼운 농담 거리를때로는 진지한 토론 거리를 던질 OO일기 시리즈’가 우리 학생 사회에서 다양한 담론을 이끌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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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기 시리즈의 주제는 AI 시대 속 창작 행위의 가치이다. <그래픽 = 김신지 기자>

 

이 일기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항하는 자세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인공지능 생성물을 비롯한 수많은 창작물이 개인의 결과물을 하찮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에 대한 생각이다. 이 글에서 일컫는 창작 행위는 예술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운동이나 연구와 같이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과 열정이 필요한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좋으니, 독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일기의 내용과 대응되는 경험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가끔가다 하는 그림 공부와 블로그 글쓰기가 내 취미이다. 취미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다가 끝에는 더 잘하고픈 욕심으로 이어지곤 한다. 말로 하기에도 새삼스럽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잘 그리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그림 뚜벅이인 내가 연습을 더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랑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창작물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못나 보여 좌절하고, 그만두고 싶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제는 사람만이 개인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인공지능까지 경쟁 상대로 투입되었다. 인간 실력자는 일을 시키는 데에 시간과 돈이라도 들지! ChatGPT는 말만 하면 순식간에 글을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고, 지브리 프로필 사진도 만들어준다. 기사에 넣을 삽화가 필요할 때면 이전엔 내가 직접 그리곤 했으나, 지금은 AI에 시키는 게 더 효율이 높다. 글을 쓰며 문장 하나가 매끄럽지 않을 때도, 머리를 쥐어짜며 고친 문장보다 AI가 추천해 준 게 훨씬 나을 때가 많다. 취미 생활과 기자 생활로 쌓아 올린 능력을 딸깍한 번에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그리고 쓰는 게 어떤 의미 있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창작의 가치는 결과물의 가치로 결정되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결과물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타인들의 인정으로, 아니면 스스로가 매기는 가치로 결정되는가? 결과물이 자타공인 망작인 상황에서는 어떨까. 창작 행위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근거로 취미생활로 느낀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려고 한다. 결과물이 어찌 되었든 창작 행위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바꾼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냥 세상과 접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리고 이것은 창작물을 직접 만들어 보지 않았더라면, 그저 그 창작물들의 소비자로만 머물렀더라면 절대 몰랐을 것들이다.

 

첫 기숙사 생활을 주제로 그린 일상툰의 일부 <그래픽 = 김신지 기자>

 

간단한 일상툰 그림체로 20컷 분량의 만화를 그려본 적이 있다. 독자에게 물어본다. 위와 같은  그림체라면, 20컷을 그리는 데에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나는 10시간이 걸렸다. 일주일 동안 조금씩 시간을 들여 한 컷 한 컷 완성한 만화를 지인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10초 만에 컷을 다 넘겨 버리고는 재미있네~”라고 말하는 순간,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각 컷에서 전달력이 좋아질지, 말풍선은 어디에 넣을지, 배경은 무엇으로 채우면 될지 등등, 10시간 동안 한 고민이 전해지기를 바란 건 큰 욕심이었다. 다른 이유에서도 지인에게 섭섭함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나도 정식 만화가의 만화를 볼 때 똑같은 행동을 했다. 심지어 그 작가님은 나보다 더 많을 노력을 들였을 테다.

만드는 건 어려운데 보는 건 쉽다. 이렇게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점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작품은 이미 있는 그대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도 '원래 정해진'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원래는 하얀 공백밖에 없었으니까. 창작물이 나오기까지 어떤 사소한 요소도 고민과 선택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빈 종이를 채우는 자유도는 무한에 가깝다.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무한 원숭이 정리라는 사고 실험이다. 원숭이가 마구잡이로 타자기를 눌러서 셰익스피어 전집의 모든 문장을 정확하게 쓰는 우연이 일어날 수 있을까? 확률이 지극히 낮을 테지만 0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한한 시간 동안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가능할 것만 같다. 수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그 언젠가는 약 107448353년 뒤에 찾아온다.[i]

A4 한 장을 채우는 영문 에세이는 약 1000단어 분량이다. 만약 당신이 이정도 분량의 에세이를 쓴다면, 원숭이가 똑같은 글을 쓸 때까지 102707 년이 걸린다.[ii] 사실 그보다 우주의 열적 죽음( 10100 )이 더 빨리 찾아온다. 이 계산을 통해 빈칸을 채워 결과물을 만드는 가능성은 실로 무한하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무작위 현상에 의존했더라면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을 글을,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써낸다.

어떤 그림이든 뒤에 숨은 의도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그린 그림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어느 날 한 웹툰 작가가 올린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낙서같이 대충 그린 듯한 단순한 3등신 캐릭터이어도, 캐릭터의 온 관절이 창의적으로 꺾여 보통 사람들은 그리지 않을 희한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고  그 자세를 시도해 보면 진짜로 가능할 것만 같았다. 인체 이론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그리는 게 불가능하다. 실제로 해보면 안다. 평범한 달리기 자세를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조차도 연습 없이는 힘들다.

이렇게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숨은 내공이 있는 그림을 보고 작가가 본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인체 묘사가 좋다고 그림을 칭찬한 댓글에 작가가 정말 감사하다라는 답글을 남기고 갔다. 다른 영상에서는 답글을 단 적이 없어 댓글을 확인 안 하는 작가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 작가는 숨겨진 노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기뻤던 걸까?

 

같은 물체여도 환경광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모습, 일상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래픽 = 김신지 기자>

 

한때 열심히 그림 이론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볼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물체를 볼 때도 감회가 달랐다. 혹시 그림자의 색이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흐린 날의 그림자는 무채색이지만 쨍하게 맑은 날의 그림자는 조금 푸른 빛을 띤다. 강한 태양 빛이 가려진 자리에 하늘에서 산란된 파란 빛이 들어와서 그림자가 푸르게 된다. 이 점을 살리면 청량한 여름 색감 같은 계절감을 강조할 수 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이에 담는 시도를 한 사람들이 무엇이 여름날을 청량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흐린 날을 우중충하게 만드는지 분석하여 세운 이론들이다. 그리는 시도를 안 했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다. 실제로 실력자들의 그림을 보면 내가 새로 배운 이론들이 빠짐없이 적용되어 있다. 그들은 오늘의 그림이 완성되기 전까지 쌓아온 노력과 실패작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나라면 이 부분에는 이런 이론을 적용해서 반영했다.’는 둥 오만 생색을 내고 싶었을 거다.

어쩌면 우리는 좋은 창작물을 너무 쉽게 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옛적 부족 사회에서는 조그만 집단 속에서 동굴벽화를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이기만 해도 주목받았을 것이다. 지금의 정보사회에서는 내 작품을 노출하기에도, 남의 작품을 보기에도 쉬워졌다. 가끔 사람은 본인이 무언가를 쉽게 얻었으면 그것을 생성하기에도 쉽다고 착각하곤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창작 도구가 발전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볼 수 있게 된 주요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크게 달라진 것은 창작의 난이도가 아니다. 뛰어난 작품을 접하기 쉽게 만드는 접근성이 높아졌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내 사견이다. 나는 창작이 보는 눈을 변화시킨다는 관점에 집중했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창작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결과물은 자신만이 알고 있기에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할 것이다. ‘딸깍한 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내 그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비 대상이 되는 그림은 쉽게 대체될지언정, 개인을 이루는 행위로서 그림은 대체될 수 없다.

 

 

김신지 기자 sjneuroneurony@dgist.ac.kr



[i] Woodcock, S., & Falletta, J. (2024). A numerical evaluation of the Finite Monkeys Theorem. Franklin Open, 9, 100171. https://doi.org/10.1016/j.fraope.2024.100171

[ii] 인용한 논문의 저자는 특정 길이의 문자열이 생성되기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을 KL/M 초라고 근사했다. 이때 K는 타자기의 자판 수, L은 문자열의 길이, M은 원숭이의 수를 의미한다. K = 30, M = 105.3라고 정한 값을 그대로 반영하고, 영단어 하나의 평균 철자 수 5.7자를 고려하면 A4 한 장 분량의 에세이는 1000단어×(5.7/단어) = 5700자라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원숭이를 동원했을 때 에세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log3)×5700-5.3 102714초이다. 초를 년으로 환산하면 약 10270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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