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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윤 기자의 ‘채식’ 일기] 먹지 않기 보다는 ‘덜 먹기’: 불완전한 나를 위한 채식

오피니언

2025. 8. 1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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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육식을 아예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고깃국이 베이스인 마라탕을 먹는다.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지만, 카페에서는 라테를 가끔 마시고, 목욕탕에 가면 바나나우유를 꼭 마신다. 내 돈으로는 동물복지란을 사지만, 술집에서는 안주로 계란말이를 시켜 먹는다. 가족들과 외식할 때면 냉면도 먹고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들어 있는 두부도 잘 먹는다.

이런 나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미디어에서 본 채식주의자와는 많이 다르기에 나를 채식주의자 범주에 포함해도 될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채식보다는 편식에 가까운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채식의 시작

채식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수강했던융합과학수업의 주제는 기후위기였다. ‘빙하가 녹아 북극곰의 살 곳이 사라져요혹은지구를 지켜요와 같은 추상적인 문구로만 기후위기를 접했던 내게 수업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기후위기는 단지 환경 문제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인권 문제였다. 사람의 삶, 생존, 권리의 문제였다. 시리아 내전의 배경에는 이상기후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있었고, 매년 2,000만명이 넘는 기후난민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에서 9위였다. 인구는 고작 5,000만명에 산유국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먹는 고기와 아무렇지 않게 타는 자동차, 귀찮다는 이유로 시키는 배달 음식모든 게 이산화탄소 배출이었다. 고작 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세계가 더 부조리하고 불평등해지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정의를 말할 자격이 내겐 없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이유였다.

 

완벽하지 않은 채식

하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내 주요 단백질 섭취원은 참치, 연어, 새우 등이었는데, 이들은 닭고기보다 탄소 배출량이 높았다. 어느 순간부터 탄소 배출량이 낮은 음식만을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죄책감도 커졌다. 특히 고기를 남기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것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기에, 배가 불러도 남은 음식을 모두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었다. 음식 앞에서 죄책감과 강박을 느끼며 섭식장애를 겪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자제력이 강한 성숙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채식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마라탕을 먹고 싶었고, 길게 늘어나는 치즈가 좋았으며, 상큼한 요구르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였다. 지속 가능한 채식을 위해먹지 않기보다는덜 먹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중이다.

 

먹지 못하게 된 것들

몇 달 전부터는 닭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남은 고기에도 손이 가지 않는다. 달걀 역시 이제는 내게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 아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부화장에서부터 이어진 삐약 소리는 우리가 한참을 걸려 모든 병아리들을 집어넣고 마침내 발효기를 작동시킨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런 병아리 덩어리들이 똥과 뒤섞이는 동안에도 삐약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팀장은 튀어나온 부위를 11자로 자른 다음 고환을 잡아 뜯어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이 작은 살덩어리는 피자 치즈처럼 길게 늘어났는데 돼지의 비명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시사IN북, 2018)

 

누군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직도 선뜻 답하지 못하겠다. 내 채식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때론 감정적이다. 채식은 어쩌면, 나 자신을 덜 미워하기 위한 완충 장치일지도 모른다. 매일 저지르는 수많은 폭력을 애써 견디기 위한 내 방식의 위로이다.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덜 해치고 싶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고,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덜 해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덜 해치기 위해 멈추고 돌아보는 삶. 채식은 이러한 삶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이다.

 

박재윤 기자 dgist100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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