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스트신문 DNA 기자들이 취재 현장 안팎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자 ‘OO일기’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본 ‘OO일기’는 지난 2020년 배현주 전 편집장이 원내 익명성에 대해 고찰한 ‘꼰대 일기’ 칼럼에 영감을 받은 후배 기자들이 선배의 뜻을 이어받아 비정기적으로 ‘일기’ 칼럼들을 발행하며 출발했습니다. 앞으로 디지스트신문 DNA는 사소하고 즐거운 이야기부터 진지한 주제까지, 취재 현장 안팎에서 보이는 다양한 이야기에 대해 자유롭고 넓은 범위로 기자의 경험과 생각을 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때로는 가벼운 농담 거리를, 때로는 진지한 토론 거리를 던질 ‘OO일기 시리즈’가 우리 학생 사회에서 다양한 담론을 이끌기를 바랍니다.
일기 시리즈 돌아보기
1. [꼰대일기] 모니터 뒤에 사람 있어요
2. [수습기자 일기] 편집장님 방 털기 (DGIST 학생생활관, 과연 안전한가?)
3. [군대일기] 깨달음이 없는 나라도 깨달은 이의 태도를 훔칠 순 있으니까
4. [편집장 일기]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손님이다. (전학대회, 선거시행세칙 개정 뒷이야기)
5. [부편집장 일기] “그 모든 일은 1/500초로 충분하다”… 퓰리처상 사진전을 다녀오고
6. [권대현 편집장의 ‘자유’일기] 샤프펜슬과 전열기구를 금지하는 사회, 자유는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하는가
7. [이상아 기자의 ‘평범’일기] 당신도 순간 악해질 수 있습니다
8. [전사빈 기자의 ‘밴드’일기] 넬 - 처절함이 묘사하는 생명력
9. [김신지 기자의 ‘그림’일기] “딸깍”하면 다 되는 세상에서, 내 그림이 의미 있나요?
10. [황인제 수습기자의 ‘투표’일기] 투표는 나비의 날갯짓이다: 혼돈의 시대, 한 표의 힘
11. [노경민 기자의 ‘애주’ 일기] 소주는 죄가 없다
12. [박재영 기자의 ‘교열’일기] 고쳐 쓰기의 중요성 – 4년차 교열팀장의 일기
13. [김신지 기자의 '조교'일기] 수강생 수와 책임감의 선형 비례: 학부생 조교의 관점에서
"이런 풀이에는 부분 점수를 어떻게 주어야 하지?"
지난해에는 시험 문제를 풀며 진땀을 뺐는데, 이제는 다른 학생의 시험지를 들고 채점하는 처지가 되었다. 전공 강의 수강생에서 조교로 역할이 바뀐 김신지 기자. 시험지 채점, 과제 관리, 출결 처리까지,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조교의 고충과 책임감을 몸소 체험했다. 이번 일기 시리즈를 통해 수강생과 조교 간의 간격이 좁혀지길 바라며, 조교 업무 중 있었던 일화와 사소한 팁을 전한다.
당신이 수강하는 강의의 조교, 어쩌면 대학원생이 아니라 학부생일 수 있다. 해마다 대상 과목이 바뀌긴 하지만, 학사행정팀은 기초 과목과 심화 과목의 일부 교과에서 학부생 TA를 모집한다. 내가 TA였을 당시에는 3, 4학년이면서 교과마다 요구하는 조건을 갖춘 학부생이라면 TA 신청을 할 수 있다. 다만, 학부 재학 중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25년 2학기부터는 2학년도 신청할 수 있고, 재학 중 지원 횟수 제한 또한 사라졌다.
2024년 봄, 나는 포털 게시판의 학부생 TA 모집 공지를 확인했다. 학부생 조교는 한 학기 80만 원의 고정 수당을 받는다. 큰 액수는 아니지만, 수강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 깊은 일이니,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 마침, 작년에 수강했던 한 물리 강의에 자리가 나 있었다. 수강자 20명 미만에, 교수님께서 직접 출석 체크를 하는 이 강의라면 조교 업무가 힘들지 않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막중한 책임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한 학기의 중턱에 학부생으로서 중간고사를 치고 나니, 조교로서 시험 답안을 채점할 때가 찾아왔다. 이 강의의 시험은 문제를 풀면 나오는 값이나 공식을 다 알려주고, 이것을 유도하는 과정을 쓰는 서술형 문제들이었다. 대부분은 강의에서 다루었던 것이기 때문에, 교재와 강의 자료가 시험 답지인 셈이다. 교수님은 나에게 이 둘을 토대로 학생들의 시험 답안을 일차적으로 채점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리고 너무 엄격하게 채점하지 말고, 부분 점수를 많이 주라고 덧붙였다.
문제와 최종 답변은 똑같은데, 풀이 과정은 정말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명분의 답안지에는 1시간 30분의 고민이 담겨있다. 수강생이 10명이라면, 조교는 총 15시간 짜리 고민의 흔적을 보아야 한다. 풀이 과정에서 빈틈이 없는지 확인하여 부분 점수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리 문제의 풀이 과정을 적는 것은, 정해진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다리를 놓는 과정이다. 출발지는 기본 물리 공식과 문제의 조건이며, 강 너머에 있는 목적지는 문제의 답이다. 그렇기에 풀이의 자유도는 상당하다. 누구는 사소한 연산 과정과 논리를 빠짐없이 적어서 빈틈없는 콘크리트 다리를 놓는가 하면, 누구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적인 식만 적어서 띄엄띄엄한 바위 징검다리를 놓는다.
수강생이 세운 다양한 풀이에 무슨 기준으로 점수를 줘야 할까? 과정이 달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만점을 받아야 한다. 연속적인 콘크리트 다리와 바위 징검다리, 둘 중 무엇을 놓느냐는 수강생의 선택에 달려있다. 아마 바위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도 답안지에 더 자세히 적기만 했다면 콘크리트 다리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세세한 계산은 다른 종이에 풀고 답안지에는 핵심만 적어서 풀이에 간격이 생겼을 뿐이다.
문제는,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의 기준에 개인차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논리적 간격이 넓어 보이는 풀이인데, 어쩌면 수험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보다 똑똑하고 암산 능력과 추론 능력이 높아서 공식 사이 간격이 그리 넓지 않다고 여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제일 애매한 유형은 목적지에 가장 가까운 발판 하나가 빠져 있는 경우이다. 중간까지만 풀이하고, 그 다음에는 주어진 답이(목적지가) 자연스럽게 유도된다고 생략하는 식이다. 논리를 다 이해했는데 하필 마지막 과정에서 풀이를 느슨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과정을 유도하지 못해서 바로 알려진 답을 적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온전한 점수를 주기 어려워서, 나중에 학생이 답안지를 보고 이의제기를 할 수 있도록 감점 사유와 부족한 풀이 과정을 상세하게 적어두었다.
제일 당황스러운 유형은 강의에서 다룬 것과 다른 풀이를 내놓는 경우다. 예를 들면, 바람이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불고 있으므로 열기구를 띄우면 다리 없이도 목적에 다다를 수 있다는 풀이다. 그러면 조교 또한 새로운 풀이를 시도해서 정말로 문제가 풀리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개념을 배우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과연 시험지를 채점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창의적 풀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를 바란다는 메모를 교수님께 남겼다.
항상 시험에 응하는 처지에 있다가, 시험을 채점하는 입장이 되니 관점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물리 시험을 칠 때마다 교수님과 조교님으로부터 ‘뭐라도 적어야 부분 점수를 줄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세요.’라는 조언을 들어왔다. 이제 그 뜻을 확실히 알 것 같다. 부분 점수는 수강자의 풀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데에서 나온다. 예상외로, 수강생의 공부한 노력, 잔꾀, 답이 나올 때까지 쓰고 지우며 계산한 시도가 답안지를 통해 잘 전달된다. 그러니 문제를 풀면서 본인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보여준다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다.
시험뿐만 아니라 과제물 관리 업무도 은근히 피곤했다. 이것 역시 수강생 수만큼 하는 반복 작업이다. 수강생이 과제물을 어떻게 제출하는지에 따라 조교가 느끼는 피로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따라서 당신이 과제물에 작은 친절을 반복하여 베푼다면, 조교는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게 감사함과 내적 친밀감을 느낄 것이다.
조교는 어떤 과제물에서 친절함을 느꼈을까? 첫째는 파일명에 과제 종류-학번-이름을 모두 적어두는 것이다. 과제물 내부에 학번과 이름을 적었어도, 파일명까지 학번 이름을 적어 두어야 파일 관리가 편하다. 신원 정보가 빠져 있으면 파일을 다운로드할 때마다 내가 대신 적어줘야 한다. 큰 수고는 아니지만, 이것이 인원수만큼 반복되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모두의 성의가 모이면 한 사람의 일이 줄어들었을 텐데!
조교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두 번째 방법은 과제물의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다. 문제 풀이 과제의 경우 핵심 수치들과 결론 등 핵심부에 따로 표시를 해두면 채점하는 처지에서 정말 편하다. 나 또한 다른 물리 강의의 수강생이었으므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과제 가독성을 높여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교로부터 '매번 답에 따로 표시를 해두어 보기 좋다'라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렇다, 사람이 느끼는 게 다 똑같다.
조교가 되어보니 그동안 몰랐던 강의 현장의 이면이 보였다. 학부생이든 대학원생이든, 조교 역시 학업을 이어가며 강의 보조 업무를 병행하는 ‘학생’이다. 어쩌면 당신이 아는 사람일 수도, 앞으로 알게 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과제를 제출할 때, 질문을 할 때, 작은 친절 하나씩 베풀어주길 바란다. 혹시 모르지, 당신이 조교가 되었을 때 그 친절을 되돌려 받을지도 모른다.
김신지 기자 sjneuroneurony@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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