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스트신문 DNA’(이하 DNA)의 모든 기사는 작성 기자 외 2~3명의 교열을 거쳐 발행한다. 교열의 범위는 맞춤법이나 오탈자의 단순한 교정부터 글의 구성을 바꾸거나 내용을 정정 혹은 삭제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대체로 글의 근간을 건드리는 수정일수록 교열자도 조심스러워진다. 작성자의 기분은 둘째 치고,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안 건드리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교열은 DNA 내부의 교열팀 소속 기자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그리고 필자는 지난 4년간 그 교열팀의 팀장을 맡았다.
고백하자면, 필자의 교열은 글을 거의 난도질해 놓는 수준이다. 교열팀 내에서도 성향이 다양해서 극도로 조심스러운 유형이 있는가 하면 (이 경우 글을 직접 고치는 것도 꺼려서 대부분 제안만 달아둔다) 상당히 과격한 유형도 있는데, 필자는 교열의 과격함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수정 전을 알아볼 수 있게 ‘변경 내용 추적’을 켜두고 글을 고치다 보면 수정사항으로 본문이 알록달록해진다. 저 많은 수정사항을 확인해야 할 기자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러나 변명하자면, 그 많은 수정사항도 처음에 교열했던 것 중 일부만 남긴 것이다. 기사는 기본적으로 창작물이므로 아무리 담백하게 써도 어쩔 수 없이 작성자의 개성이 묻어나온다. 교열자 또한 자기 글의 스타일이 있는 만큼 교열 작업 때도 그 시야에서 바라보기 쉽다. 즉 자기 스타일과 다른 글은 읽을 때 거슬린다. 필자는 교열을 할 때 ‘기사를 처음 읽는 독자’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읽다가 거슬리는 부분은 바로바로 고친다. 그러고 나서 교열한 부분을 다시 읽는데, 이때 처음 교열한 내용의 절반 정도를 이전 상태로 되돌린다.
거슬리는 부분을 일일이 수정한 다음 다시 읽어보면, 수정한 것보다 기자가 쓴 원본이 대부분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글은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부분을 고치면 연결된 다른 부분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문체는 통째로 갈아엎을 생각이 아니라면 내버려두는 게 낫다. 어설프게 고치다 말면 글이 조각조각 기운 누더기 같아진다. 그래서 일단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다 건드린 다음 남겨둘 것과 되돌릴 것을 가려낸다.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탓에 웬만하면 작성자가 잠들었을 새벽녘에 교열 작업을 한다. 남겨둔 것만 확인해달라는 뜻이다.
두 번째 변명은, 글을 더 낫게 만드는 게 교열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직접 쓴 글은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법이다. 자기만 아는 내용을 남들도 안다고 착각하거나, 특정 단어에 ‘꽂혀서’ 더 나은 단어를 찾을 생각을 못 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도 글을 쓸 때 이런 실수를 자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의 관점에서 글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교열이 필요하다.
글은 다시 쓸수록 좋아진다. 필자는 (작성자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초고는 쓰레기”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신봉한다. 물론 초고는 소중하지만, 다시 쓸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소중하다. 초고부터 완벽한 글은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에는 없다. 사실, 애초에 완벽한 글이라는 것이 없다. 못쓴 글과 그보다는 나은 글의 반복이 있을 뿐이다.
물론 자기 손으로 쓴 글을 지적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앞에서 남의 글을 난도질한다고 해놓고서 우습긴 하지만, 정작 필자 본인도 다른 기자에게 교열을 받을 때는 긴장한다. 교열자와 의견이 다를 때는 특히 그렇다. 서로 조심해서 말하긴 하지만 의견 충돌이 있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필자는 본인이 쓴 글에 자부심, 어쩌면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지적받을 때면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럴 때 필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린다. 기자든 과학자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겸손한 건지 대담한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는 수십 년간 작가로 살면서 인생과 글쓰기에 스스로 규칙을 부여했는데, 그중 하나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이다. 수긍할 수 없더라도, 지적받은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고치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지적이 있었으면 반드시 뜯어고친다. 그리고 그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라고 말한다. 필자 역시 그의 방식을 따라 교열 과정에서 지적받은 부분은 어떤 방향으로든 고친다. 고칠수록 글은 점점 더 나아진다. 교열자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비슷한 이유로, 내가 교열한 내용을 작성자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이유(작성 의도와 다르다거나, 더 나은 표현이 생각났다거나)가 명확하기만 하면 된다. 작성자는 교열자의 의견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자기 글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설령 수정 없이 같은 표현을 유지할지라도, 초고에 고민 없이 쓴 단어와 몇 번의 교열을 거쳐 남긴 단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이 자리에 이 단어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유’를 기자 스스로 분명히 아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교열의 목적은 글을 더 낫게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과정이 생각과 달랐던 것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교열은 까다로운 작업이다. 기사 작성의 원칙도 지키면서, 작성자의 의도도 살펴야 하고, 내 교열이 편협한 사고에 기반한 의견은 아닌가 고민도 해야 한다. 때로 ‘뭔가 거슬리긴 하는데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오리무중의 상태가 10분 이상 지속되면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라며 작성자에게 무책임하게 떠넘겨 버리기도 한다. 다행인 점은 거의 항상 작성자가 더 좋은 표현을 들고 온다는 것이다. 역시 작성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자 본인이다. 교열자는 정 대안이 안 떠오르면 독자로서 거슬리는 부분을 짚어주기만 해도 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4년 내내 교열팀장으로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교열은 귀찮은 일이 맞다. 기자가 어련히 알아서 잘 썼겠거니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럴 때면 필자는 소설 첫 문장의 조사를 사흘간 아침마다 ‘–이’와 ‘–은’으로 번갈아 고쳐 썼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조사 하나에도 미묘한 의미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글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의도와 의미가 숨어있겠는가. 그것을 가능한 한 잘 드러나게끔 고치는 것이 교열이 하는 일이다. 작성자와 함께 글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제 졸업을 한 달 앞둔 고학년이고, 교열팀장 자리는 이미 후배에게 넘겼다. 이 연차에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괜한 잔소리를 하는 기분이지만 DNA에 더 이상 필자를 막을 만한 선배가 없는 관계로 객기를 부리기로 한다. 이 기사가 올라간 지 한참 지난 후에 우연히 이 글을 찾아 읽는 후배(DNA 기자이든 아니든)가 있다면, 예전에 이런 생각으로 교열을 하던 선배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 주면 고마울 것 같다. 앞으로의 DNA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는 알 수 없지만, 기자들이 교열과 고쳐 쓰기의 중요성을 기억해 주기를. 그리고 교열 작업에 자부심, 너무 거창하다면 적어도 보람 정도는 느끼기를.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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