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질서 지켜낸 대한민국
다음 할 것은 몇 년간 고착된 ‘진영 정치’ 청산
국민에게 ‘협치’ 바탕으로 한 ‘이념’ 논리로 응답해야…
‘생산적인 싸움’으로 대의민주주의 본질 되살릴 때
대한민국이 혼란스럽다. 우리 정치 지형이 언제부터 이렇게 혼란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고 불린 지난 20대 대선부터인지, ‘이조 심판’과 ‘정권 심판’이라는 주장들 속 ‘정책’이 아닌 ‘심판’만 부각됐던 22대 총선부터 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몇십 년 만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식민지 출신 유일무이 국가인 우리 대한민국이 필연적으로 지닌 숙명이자 종양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우리 정치에 대화와 협치는 사라졌다. 대통령은 소통을 거부하며 등 돌렸고, 거대 야당도 이에 질세라 줄탄핵과 함께 강경히 나아갔다. 모 정치인이 말한, 국회에서 싸우고도 또래 여야 의원들끼리 여의도 삼겹살집에 모여 소주잔을 나누던 ‘3김 시대의 낭만’은 진즉이 사라진 듯하다. 그렇게 마침내 지난해 12월 3일, 당시 대통령은 명백히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해 이에 방점을 찍었다.
계엄 후 4개월여 지났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보수’를 자칭하며 ‘자유’라는 우파의 가치를 정면으로 배반한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열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다. 탄핵 선고까지 탄핵 찬성와 탄핵 반대로 나뉘고 서로를 ‘빨갱이’와 ‘내란견’으로 부르며 분열한 우리 대한민국이, 절망적인 분위기지만 어쩌면 다시 일어설 희망을 볼 수 있을 60일이다.
정책 뒤로 한 채 ‘진영 논리’로 싸워온 대한민국
독재 시대가 막을 내린 1987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진영 논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진영 논리’는 ‘이념 논리’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진영’과 ‘이념’은 명백히 다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이념’이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를 뜻한다. 정치 참여자로서 개인에게 이념이란 ‘신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인지’에 대한 굳건하고 존엄한 생각이다. 모두에게 다른 것이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각자의 생각과 이념이 같을 수 없다. 그렇기에 개인은 보수주의를, 진보주의를, 자유주의를, 공화주의를,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를, 별의별 ‘주의’를 외친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우리 ‘시민’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 본인의 ‘주의’와 제일 비슷한 이념을 지닌 정치인을 선출한다.
때문에 정치인은 이 ‘이념’ 때문에 싸운다.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멋진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정치 선진국이란, 국민의 대리인인 정치인이 싸우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정치 문화가 낙후된 곳은 국민이 ‘스스로’, 즉 내전을 통해 싸운다. 우리도 75년 전 그 상황을 겪어봤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 21세기에도 이어가는 나라가 있다. 그렇기에, 처절하게 싸우는 여의도를 보면 얼굴 찌푸려지는 고성 속에서도 무엇인지 모를 흐뭇함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요즘 그 마음이 달라지려 한다. 지금 우리 정치는 ‘이념’이 아니라 ‘진영’으로 싸우고 있다. 자기 편이면 무조건 두둔하고, 상대편이면 무조건 비난하는 자세가 잘못됐다. 어느 진영은 본인의 수장을 지킨다며 무리한 ‘방탄’ 조치를 펼쳤고, 어느 진영은 자신 진영에서 배출한 자라는 이유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을 보호하려 했다.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인이라는 자들은 언젠가부터 최고위원회의나 언론 인터뷰에서 본인들의 비전보다 상대 진영 사람이 한 잘못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 진영 논리에 완벽히 매몰되었다.
적절한 근거 없이 ‘상대’라는 이유로 총알을 퍼붓는 것이다. 모 정치평론가가 한 이야기처럼, 과거에는 내 진영에서 정반대에 떨어진 사람만 적으로 보고 나머지를 동지라 생각하며 협치했다면, 지금은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만 동지로 보고 나머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산적인 싸움 위해 ‘이념 논리’로 토론해야
정치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진영 논리’로 싸우지 마시라. 우리를 대신해 싸우라고 당신들을 뽑아줬지만, ‘진영’으로서 싸우라고 뽑은 것이 아니다. ‘정책’으로서 싸워라. ‘이념’으로 싸워라. 당신들이 싸울 수 있는, 싸워야 하는 쟁점은 아예 다른 곳에 있다. 예컨대 경제나 노동 정책이다. 우파 정치인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자유 무역 등을 통해 민간 주도 경제 성장을 꾀하고, 노동 유연성을 통해 기업 자율성을 강화해 사회를 번영시키겠다 말한다. 좌파 정치인은 반대로 대기업을 규제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등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게 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며 노동자 권익을 보전하겠다 외친다. 그들은 첨예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이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싸움’은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진영 논리를 통한 싸움’은 전혀 다르다. 거칠게 말하자면, 모 당대표가 위증교사를 했든 그렇지 않든, 모 여사가 샤넬 백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세상은 그대로이다. 그 사람들이 감방에 가든 무죄 판정을 받고 당당하게 길거리를 활보하든 국민의 삶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죄가 있다면 당연히 법치주의하에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워싱턴 D.C로부터 여러 혼란이 한반도를 덮쳐 오고 있으며, 북쪽에는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산적으로국민 생활을 개선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최근 여야가 합의해 국민연금 개혁안을 낸 것처럼 실질적인 일을 하시라. 그 내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필자이지만, 오랜만에 ‘정책’으로 겨루고 협치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겠다.
그렇다고 단순히 정책을 주장하기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 진영에서 주장한 정책의 정반대 정책만을 주장하며 공격하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정책 대결’이라 오판하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원한다.
국민은 스스로 가진 신념과 이념에 따라, 이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선출하겠다. 당신들은 본인의 신념과 이념에 따라 정책 방향을 결정하라. ‘민주당 ‘빨갱이’ 세력이 이렇게 선택했으니 반대 정책을 밀겠다’ 말고, ‘국힘 ‘수구 꼴통’ 놈들이 이런 정책을 주장하니 우리는 동의 못 하겠다’ 말고, 다른 것을 원한다. ‘자유지상주의자임을 자청하고 선출됐으니, 이에 맞는 정책을 밀겠다’나 ‘사민주의를 말하며 신임받았으니, 그에 따르는 정책을 펴겠다’를 원한다.
‘이념’이라는 단어가 격변하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오염됐다. 조금이라도 좌파적인 생각을 하는 이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며 박해한 역사가 이 단어를 말하기 섬뜩하게 만들었다. 색깔론 따위는 ‘이념’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인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고 폭격하는 ‘진영’ 논리다.
오는 대선이 중요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구축한 실질적 민주주의 체제가 거의 붕괴할 위험을 겪은 후 치르는 첫 대규모 선거이다. ‘OO 심판’ 따위 단어와 ‘범죄자에게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라는 메시지나 들렸던 지난 선거들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 ‘처단’이나 ‘척결’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내란의 우두머리였던 자는 이제 파면됐으니, 남은 사람들은 서로 협치하며 나아가야 한다. 상대에 대해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선거를 완주하길 바란다. 정치인들이 최고위원회의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상대 당의 대표나 과거 행위보다 본인들이 가진 이념과 그리는 미래에 대해 더 많이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당신들이 그릴 미래를 살아갈 청년으로서 부탁한다.
오는 대선에서, 그리고 앞으로 여의도에서 치열하게 싸워라. ‘진영’ 논리가 아닌 ‘이념’ 논리로.
※ 본 사설은 기자의 주관이 포함된 글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권대현 기자 seromdh@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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