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휴대 가능한 장치… 자연의 패턴 그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워"
"'Physics with a Bang!' 18년…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아이들에게 환원"
"부엌 카운터의 커피 얼룩에서 시작된 연구… '동료 모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무질서 속에서 물리 법칙을 다시 정립해야… STAY CURIOUS, 자신의 길을 가라"
세계적 석학을 초청해 강연을 여는 'DGIST Distinguished Lecture Series(DLS)'가 어느덧 31회를 맞았다. 이번 강연자로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시드니 R. 네이겔(Sidney R. Nagel) 석좌교수가 한국을 찾았다. 연성 물질 (Soft matter)물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는 모래 더미, 물방울, 커피 얼룩처럼 누구나 매일 보는 일상의 현상에서 새로운 물리 원리를 발견해 왔다. 네이겔 교수와 인터뷰를 통해 ▲강연 비하인드 ▲연구 철학 ▲DGIST 학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었다.
이번 강연은 제31회 'DGIST Distinguished Lecture Series(DLS)'의 일환으로, 'Patterns and Structure in Nature'를 주제로 약 한 시간 동안 펼쳐졌다.
그는 무질서, 비선형 동역학, 비평형 과학 같은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2023년 미국물리학회(APS)가 수여하는 '연구 분야 최고 성취 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Q. DGIST와 한국 방문 소회가 어떠한가. 강연 주제로 'Patterns and Structure in Nature'를 택한 이유와 학생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한 가지 메시지가 궁금하다.
DGIST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한국과 대구는 여러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사실 나는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도 대구에 가족이 많이 있다.
강연 주제로 'Patterns and Structure in Nature'를 택한 이유는 그것이 내 연구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전공자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을 만큼 풍부하고 보편적인 주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강연에서 보여준 실험들이 현상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답다. 청중이 그 안에 담긴 깊은 물리학 원리뿐 아니라, 자연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까지 함께 느끼고 갔기를 바란다.
Q. 강연에서 직접 실험을 시연했다. 수많은 실험 중 그것을 청중 앞에서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시연을 고를 때는 '확실히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많은 청중 앞에서 기기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또 너무 복잡한 장치는 오히려 메시지를 흐린다. 이번 시연의 핵심 메시지는 '내가 보여주는 패턴들이 누구나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그 먼 길을 와야 했기에 장치 역시 휴대가 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단순한 장치로 만들어낼 수 있는 패턴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Q. 시카고대의 'Physics with a Bang!' 등 공개 강연도 오랫동안 해왔다. 학자가 청중 앞에서 직접 실험을 시연하는 일의 교육적,학문적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가 하는 일을 더 많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은 과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대중이 과학, 특히 물리학을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Physics with a Bang!'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에게 과학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큰 즐거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18년 전 이 쇼를 시작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재미있고 싶어서였다. 물리학 수업에서 쓰던 멋진 시연들을 한꺼번에 꺼내어 신나게 펼쳐 보자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렇게 열광적인 관객들이 모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매년 같은 학생이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사는 시카고 남부는 자원이 부족한 지역이다. 이곳의 많은 아이들은 학습 기회에 굶주려 있다. 'Physics with a Bang!'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Q. 오랜 시연 활동 가운데 특히 좋아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실험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내가 하는 시연 모두를 사랑한다. 청중 앞에 설 때마다, 각 시연이 서로 다른 원리를 놀랍고도 매혹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모습에 매번 감탄한다. 어떻게 보면 나는 각 시연을 펼칠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다.
특히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 시끌벅적하고 '스펙터클한' 시연들을 잔뜩 보여주며 청중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뒤, 갑자기 아주 조용하지만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시연을 하나 한다. 그러면 청중이 일제히 침묵하고, 감탄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솔직히 어떤 시연은 혹시 이번엔 안 되면 어쩌나 정말 긴장된다. 히지만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었다. 물리는 그런 점에서 멋지다.
Q. 커피 얼룩, 물방울, 모래더미처럼 누구나 매일 보는 현상에서 새로운 물리 법칙을 발견해 왔다. '평범한 것'에 학문적 시선을 처음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가.
원래 나는 시각적으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실험들을 했다. 그러다 입자물질의 물리, 즉 모래더미의 물리를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현상을 일상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고 그 현상들이 더 특수한 실험들만큼이나 물리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상의 현상'들은 무질서, 비선형 동역학, 비평형 과학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다. 모두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물리학이 입문 수업에서 다루는 익숙한 문제들만큼의 정밀도로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영역들이다.
Q. 2023년 APS 메달 수상 당시 "무질서 속에도 질서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무질서한 시스템이 학자로서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오랜 세월 동안 과학, 특히 물리학은 질서 잡힌 구조에 집중해 왔고 큰 진보를 이뤘다. 원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점점 더 정밀하게 통제하는 데 기반한 반도체 산업 전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무질서한 물질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길이라고 본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여러 면에서 매우 무질서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현상이 바로 이 무질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가 무질서의 몇몇 측면에 주목하고, 그것들에도 고유한 원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 기쁘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질서는 한 시스템에 수많은 제약을 부과한다. 무질서가 있을 때 그 제약들은 어느 정도 풀린다. 그러니 우리는 더 넓고 덜 제약된 이 환경 속에서 물리 법칙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본다.
Q. 커피 얼룩 효과는 이제 학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발견이 됐다. 처음 이 현상이 '연구해 볼 만하다'고 판단한 순간과, 연구 과정에서 가장 놀랐던 결과는 무엇이었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부엌 카운터를 보니, 전날 미처 닦지 못한 커피 자국이 있었다. 문득 이 얼룩이 왜 이런 모양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누구도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설령 설명을 한다 해도, 사람마다 답이 달랐다.
몇 차례 조사를 해보니 이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뚜렷했다. 그때부터 이 문제가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모양의 원인을 알아내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지금은 결과가 당연해 보이지만, 처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풀어내는 데 진짜로 많은 노력이 들었다. 일부 동료는 우리 연구를 좋아했고, 일부는 시시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다!
Q. 'Jamming transition' 연구는 알갱이가 흐르다가 갑자기 굳는 현상을 다룬다. 이 개념이 자연 현상이나 산업에 어떻게 응용되고 있으며, 앞으로 가장 흥미롭게 확장될 영역은 어디라고 보는가.
잼은 흐르는 입자에서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절대영도'에 가까운 조건을 들여다보았다. 이는 모래더미 같은 거시적 사례들에 대해 좋은 근사가 되며, 이 근사 덕분에 문제를 크게 단순화해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연구는 새로운 갈래로 이어졌다. 바로 '재료에 본래 없던 새로운 기능을 학습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 그룹은 지금 이 '재료에 기능을 학습시키는' 아이디어에 상당 부분 집중하고 있다. 이것이 새롭고 유용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 산업 공정에도 의미를 갖기를 바라고 있다.
Q. 연성 물질 물리학이 풀어내야 할 가장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무엇이며, 향후 10~20년간 분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는가.
그 답을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것은 이 분야가 놀라울 정도로 풍성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 주제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때로는 이런 발견들이 더 폭넓게 적용 가능한 놀라운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지금 가장 흥미를 느끼는 영역은 '재료 학습'이라는 아이디어다. 한 가지 ‘응용 가능성은 단백질이 어떻게 매우 특수화된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가?’와 같은, 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은 문제들이다. 이는 '물질 속의 기억 형성'이라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생체 물질과의 관련성에서도 매혹적이다.
Q. 마지막으로, 기초과학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연구 길을 찾고 있는 DGIST 학생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을 잃지 말 것(STAY CURIOUS)! 자신의 흥미를 끄는 길을 따라가라. 그 길이 동료 모두가 좋아하는 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지,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심을 가져라. 나도 물리학자로서 나 자신을 찾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여전히 변해가고 있다.
한편, 네이겔 교수는 답변 말미에 한 가지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그는 "위 답변은 모두 1인칭으로 썼지만, 독자 여러분이 꼭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점이 하나 있다"라며 "내 모든 연구는 그룹의 노력이었다. 함께한 협력자들과 그룹 멤버들 모두가 훌륭했다. 이 점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조용준 기자 dydwns2735@d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