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영국, 엄격한 규율의 가톨릭 남학교. 군대식 행진으로 나타난 네 명의 학생이 고해성사를 마치고 라틴어, 수학, 물리학, 인문학을 배우며 하루를 보낸다. 이윽고 야심한 밤이 되자 네 학생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비밀 장소에 모인다. 그들은 붉은 천으로 감싸 숨겨두었던 한 권의 금서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책의 제목은 R&J, 즉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야기에 매료된 학생들은 급기야 책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 연극을 하기 시작한다.
연극 <R&J>에는 별다른 줄거리가 없다. ‘네 명의 학생이 몰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그들만의 연극을 꾸민다.’ 그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그리고 ‘왜’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학교’는 매우 삼엄한 장소다. 등장부터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는 군대식 행진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강박적으로 기도문을 읊고 배운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며 마치 기계처럼 움직인다. 학생 한 명이 의자 위에서 다리를 맞는 체벌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의 교육관이 이상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오직 이성만을 중시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관 아래 자라는 학생들은 개인의 정체성마저 묵살당하며 획일적으로 ‘이성적이고 올바른’ 인간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이를 암시하듯 <R&J>에 등장하는 네 사람은 개인을 정의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인 이름조차 박탈당했다. 그들의 배역명은 그저 ‘학생1, 2, 3, 4’일뿐이다. 수많은 ‘학생’들 중 하나로 교육받아 온 그들은 연극을 통해서야 비로소 로미오, 줄리엣, 벤볼리오, 머큐쇼, 티볼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amo, amas, amat, amamus, amatis, amant
<R&J>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학생들이 연극을 시작하며 외치는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이제부터 무대 위에 펼쳐진다”는 <R&J>를 대표하는 대사다. 그렇다면 왜 주제가 사랑 이야기여야 하는가? 이는 학교의 억압에 저항하고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인’을 되찾는 과정에 있어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학생들 중 연극을 주도하는 이는 ‘학생1’이다. 이 학생은 앞선 고해성사 시간에 혼자만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기계처럼 똑같이 움직이는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그 모습은 단연 눈에 띈다. 학생1은 곧 기도실을 몰래 빠져나와 공책에 편지를 쓰는데, 이때 인용하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47번이다.
내 사랑은 미치도록 뜨거운 열병인 것 같아.
그런데 난 이 열병이 낫지 않고
오히려 활활 불타오르기를 바라고 있어.
- 셰익스피어, <소네트 147번> 중
감정은 개인의 고유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다. 한 사람의 감정은 오직 그 자신만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사조 중 낭만주의가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랑, 슬픔, 외로움 등의 감정 표현을 중시한 것과 같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그 상대가 오직 로미오이고 줄리엣이어야 하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왜 학생1이 연극의 소재로 이 책을 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중 짧게 지나가는 라틴어 수업 장면에서 학생들이 외치는 “amo, amas, amat, amamus, amatis, amant”는 모두 ‘사랑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amare’의 격변화다. 그들은 ‘amare’의 문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학교는 그들에게 감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을 통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워가게 된다.
카타르시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 속의 사랑은 마냥 행복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책 속에 담긴 것은 미숙하고 충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랑, 폭력, 욕망의 이야기다. 학생들은 연극을 이어가며 겁을 먹거나 충격을 받고 책을 집어던져 버리기도 한다. 감정을 죽이도록 교육받아 온 그들로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담긴 날것의 감정을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다. 이는 그러한 감정들이 자신의 내면에도 있음을, 학생들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희열, 쾌감의 의미로 오용되는 ‘카타르시스’는 본래 ‘정화’라는 뜻으로, ‘비극을 통해 응어리진 감정을 표출하고 정화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
카타르시스는 관객의 썩어가던 감정이 비극을 통해 분출되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슬픔, 분노, 질투,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껴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른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부정적 감정은, 살면서 누구나 자연히 겪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용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점차 거대한 응어리가 되어 내면을 짓누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은 비극의 관객이 되어 비극적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연민과 공포를 느끼고, 억눌러왔던 감정의 응어리가 해소되는 경험을 겪는다.
내면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경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며 혼란에 빠지는 학생들 또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과정에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상은 ‘학생3’이다. 학생3은 줄리엣의 아버지 배역에 몰입한 나머지 줄리엣 역의 학생2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려다가 자신의 폭력적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이 학생은 앞서 의자 위에서 다리를 맞는 체벌을 당한 그 학생이다. 자신이 피해자로서 당했던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마음이 본인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학생3은 부인하고 싶었던 자기 내면의 부정적 면모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 교수는 ‘내면의 열등한 인격’으로서의 ‘그림자’를 정의하며 “자신 속에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림자는 숨기고 외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주 보고 표현해야 하는 대상이다.
자기의 열등한 감정을 표현하면 처음에는 폭발적인 표현이 되어 남들이 놀라고 자기도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표현을 계속한다면 원시적 감정은 차츰 분화되어 남들이 싫어하지 않게 하면서도 적절히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 이부영, <그림자> 중
학생3은 자신의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결국 친구들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까지 극을 이어간다. 마침내 마지막 장면을 맞이한 순간, 아침이 밝아오며 학교를 상기시키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겁먹은 표정으로 학교로 돌아가려는 학생2, 3, 4를 보며 학생1은 “지금은 깊은 밤”이라고 울부짖는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온 친구들을 둘러보던 학생1은 “어젯밤에 꿈을 꿨어”라 외치며 연극에 쓰던 붉은 천을 공중으로 던진다. 던져진 붉은 천은 무대의 정중앙을 펄럭인다. 해방된 감정을 상징하듯,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극 <R&J>가 기반으로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 명작으로 칭송받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권오숙 박사가 ‘인간 심리의 집요한 관찰’이라 칭했을 정도로 의심, 망설임, 혐오, 질투, 슬픔, 권태, 공포, 사랑 등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들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독자 혹은 관객은 그의 작품을 통해 자기 내면에 숨어있던 감정들이 표출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해방감을 만끽한다. 기껏해야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한 작품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 영화, 음악, 연극, 뮤지컬, 어떤 매개를 통해서라도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카타르시스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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