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뮤지컬 <스모크>, <팬레터>,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트레이스 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뮤지컬 배우 임병근의 석사학위논문 <시인 이상(李箱)의 거울 모티프 활용과 분열적 자아의 연구: 뮤지컬 <스모크> 중심으로>(2021)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 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중략) 나는 거울 속에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령어되어 있드키 그도 나 때문에 령어되어 떨고 있다.
- 이상, <오감도 시제15호> 중 일부
뮤지컬 <스모크>를 보았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시를 쓰는 ‘초’, 바다를 그리는 ‘해’, 마음을 들여다보는 ‘홍’. 해는 바다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초와 함께 홍을 납치한다. 그러나 홍은 어째서인지 해를 아는 사람처럼 친밀하게 대하고, 해는 홍이 자신과 같은 시와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그러나 돌아온 초는 냉랭한 태도로 홍이 해에게 상처만 주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초와 홍은 서로가 해를 괴롭게 한다며 비난하고, 해는 그런 둘을 보며 무언가 떠올린 듯 고통스러워한다.
초, 해, 홍은 극의 주인공인 시인 이상의 분열된 자아들이다. 이상, 본명 김해경은 어린 나이에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엄격한 가풍 아래 자랐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나 백부의 반대로 화가의 꿈을 포기했고, 이후 문학계에 등단했지만 난해한 작품들은 대중의 혹평을 받았다. 스스로를 천재로 여겼던 이상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절망했다. <스모크> 속 이상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모든 감정들, 미움, 열망, 희망, 사랑을 떼어내 ‘홍’을 만들고, 비웃음 당하는 시인으로서의 자아를 분리해 ‘초’를 만들고, 자신은 그림을 사랑하는 어린아이 ‘해’의 자아로 남았다.
이 세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넘버 「연기처럼」에서였다. 가사에서 이상의 <오감도 시제15호>를 인용하며 ‘거울’을 언급하는 순간 그들이 모두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자아임을 깨달은 것이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에 봤던 다른 작품들에서도 거울이 유사한 모티브로 사용되었던 것이 떠오른 까닭이다. 의문이 들었다. ‘왜 거울일까?’
거울의 본 기능은 대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거울은 평소라면 결코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을 보듯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아의 타자화를 유도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낯설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처럼 거울에 비친 익숙하고도 낯선 형상은 자아 탐구의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특히 그 상의 주인이 <스모크> 속 이상처럼 분열된 자아를 갖고 있을 때, 거울은 인격의 주체가 또 다른 자아를 마주하는 도구가 된다. 거울의 이러한 특성을 차용한 여러 작품 중 네 개의 뮤지컬, <스모크>·<팬레터>·<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트레이스 유>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 칼럼을 쓴다.
거울 속 나는 내가 아니다
뮤지컬 <스모크>는 이상의 <오감도 시제15호>, <거울>, <날개>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모티브를 차용했다. 특히 그의 작품 다수에서 드러나는 ‘거울을 통한 자아의 타자화’는 <스모크>를 관통하는 주제다. 초, 해, 홍은 모두 이상의 인격을 구성하는 자아들이다. 흔히 다중인격이라 부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일각에서는 초, 해, 홍을 이와는 구분되는 이상의 ‘분신’으로 설명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인격 간에 소통이 제한적이고 외부에서 다른 인격의 발현을 관찰할 수 있다. 반면 분신은 한 인격 내에서 자아가 여럿으로 분열된 것으로, 자아끼리 서로를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으며, 그 소통은 주로 내면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뮤지컬 <스모크>의 무대가 인간의 대뇌를 형상화한 반구형이라는 점 역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상의 분열된 세 자아는 거울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고, 주체에 가장 가까운 ‘해’의 자아가 분리되었던 두 자아 ‘초’, ‘홍’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한 인격으로 되돌아온다. 초, 해, 홍이 통합된 그의 인격은 어린아이의 열정과 세상에 치인 이의 초연함, 미래를 향한 희망과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의 절망, 그럼에도 다시 품는 희망이 혼재된 ‘이상’이 되어 현실로 복귀한다.
거울 속 이상화된 자신
<스모크> 속 분열된 세 자아가 각자의 강점과 결핍을 갖고 서로를 마주한다면, 뮤지컬 <팬레터> 속 거울이 비추는 것은 현실의 자신과 다른 ‘이상화된 자신’이다. <팬레터>에는 유명 소설가 김해진과 그의 열렬한 팬인 작가 지망생 정세훈이 등장한다. 정세훈은 김해진에게 필명 ‘히카루’로 팬레터를 보내며 자신이 그의 소설 속에서 발견한 슬픔에 관해 쓴다. 김해진은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인해 팬레터의 발신인을 여자로 착각하고,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준 편지 너머의 인물에게 사랑에 빠진다. 정세훈이 그를 직접 만났을 때 김해진은 이미 히카루에게 깊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를 실망시킬까 두려웠던 정세훈은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면 차라리 완벽히 속이겠다는 의지를 품고, 스스로 미지의 여인 히카루가 되어 김해진과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히카루는 단순히 정세훈의 다른 이름이 아닌 그의 또 다른 자아로 발현되며, 점차 히카루의 자아를 정세훈의 자아가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히카루는 정세훈이 되고 싶었던 이상화된 자기 자신이다.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어리숙하고 수줍음 많은 정세훈과 달리, 히카루는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에 조용하고 고집 있는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그녀는 정세훈이 불안에 떨 때마다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며 그를 이끌어가고, 정세훈은 기쁘게 그녀를 따른다. 히카루가 쓴 소설은 김해진에 의해 투고되면서 관능적이고 대담한 문체로 문단의 찬사를 받는데, 이러한 문체는 정세훈이 아닌 히카루의 인격으로서만 가능하다. 정세훈은 넘버 「거울」에서 히카루를 마주하며 그녀가 자신의 ”당당하고 아름답고 사랑받는 꿈”이었음을 인정한다. 정세훈은 히카루의 인격을 발현시킴으로써 이상화된 자신을 구현하는 동시에,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정세훈에게 당당한 모습이 필요할 때 히카루의 인격이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하기 때문이다.
낙인에서 벗어나 거울을 마주하는 순간
히카루는 사실 정세훈의 내면에 숨어있던 또 다른 그의 성격이다. 정세훈이 정말로 어리숙하고 겁 많은 인물이었다면 어떻게 김해진을 비롯한 모두를 속여가며 스스로 히카루가 될 생각을 했겠는가. 그럼에도 작중 정세훈의 인격은 히카루와 뚜렷하게 구분되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주변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정세훈이 급사로 일하는 칠인회의 작가들은 그를 “우리 세훈이”라 부르며 귀여워하는데, 이는 친밀감의 표시인 한편 열여덟 살인 그를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주변인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는 그 사람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낙인 효과라고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 어른스러운 성격의 사람이 부모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람 앞에서 유독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을 어릴 때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사람 앞에서 그 기대에 따라 스스로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세훈은 특히 칠인회 앞에서는 여전히 어수룩한 아이의 모습으로 남으며, 오직 혼자 있을 때만 거울을 통해 히카루를 마주한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고 한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아를 인식함에도, 역설적으로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찍은 낙인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 인격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은? 바로 거울 보기다.
닿을 수 없는 곳, 거울 너머
‘거울 속 이상화된 자신’의 또 다른 예로 뮤지컬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이하 <더테일>)를 빼놓을 수 없다. <더테일>은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과 그의 주치의였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존은 바이런과 갈등을 겪고 그를 떠난 후 바이런을 모티브로 한 인물 ‘루스벤’이 등장하는 소설 <뱀파이어 테일>을 쓴다. 그러나 1819년 4월 1일, “세상에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던” 그 글이 만우절의 거짓말처럼 바이런의 저작으로 발표된다. 존은 투고한 적 없는 자신의 글이 심지어 바이런의 이름으로 출간된 것에 당황하고, 소설을 읽은 바이런이 존을 찾아오며 <더테일>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이런은 존이 3년 전 자신을 떠난 이유, 소설을 쓴 이유, 그리고 소설 속 루스벤이 사랑했다는 여인 ‘이안테’의 정체를 추궁하며 그를 몰아붙인다. 걸음이 아름답고 눈부시게 빛나는 여인, 기쁨과 황홀함의 여신이자 ‘카슈미르의 나비’ 이안테. 짐작할 수 있듯, 이안테는 존이 자기 자신을 투영하여 만든 그의 분신이다. 존은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떼어내어 이안테를 창조하고, 바이런을 모티브로 한 인물 루스벤이 이안테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다. 이안테는 「존, 카슈미르의 나비(카슈미르의 나비 Reprise)」에서 존에게 “너의 몸은 나의 무덤”이라 속삭이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존은 거울을 마주보며 그 안에 비친 이안테를 만난다.
이안테는 존으로부터 태어난 그의 일부이지만 그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팬레터>의 히카루가 정세훈의 사랑받고 싶은 꿈이듯, <더테일>의 이안테는 존의 사랑받고 싶은 꿈이다. 소설 속 루스벤이 이안테를 사랑하게 한 것은 바이런을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존의 열망을 나타내나, 동시에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안테이며 그녀가 아닌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다 여기는 존의 속내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더테일>의 거울 속 자아와 현실의 자아는 서로에게 손을 뻗으나 결코 맞닿지는 못한다. 두 세상은 거울의 반사면을 경계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테일>의 무대디자이너 박상봉은 “거울은 자신을 타자화하여 보여주는 도구이고, 거울 속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거울은 두 자아를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둘을 단절시키는 모순적 특성을 지닌다. 이상의 시 <거울> 중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더테일>은 무대에 여러 개의 거울을 배치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예 바닥 전체를 거울처럼 반사되는 하이그로시 소재로 설치했다. 작중 “이야기는 현실을 예언하고, 현실은 이야기를 모방한다”는 바이런의 말과 같이, 밤의 호수처럼 일렁이는 검은 바닥은 존의 환상을 비추는 거울이며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거울의 반사면, 즉 환상과 현실의 경계면이다. <더테일>은 존이 부정해왔던 자신의 진심을 인정하고 이안테의 자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거울은 현실 속 자아와 환상 속 자아를 분리하고, 마주보게 하며, 그 둘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사랑하는 것은
이러한 거울과 자아의 관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으며, 그 흔적은 2000년을 거슬러 올라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기애,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어원이 된 나르키소스 설화가 그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설화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설명을 한 넘버의 가사로 대체하고자 한다. 뮤지컬 <트레이스 유>의 두 번째 넘버 「어느 소년 이야기」다.
유성처럼 빛이 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느 소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원했지만 그는 절대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아
화가 난 사람들 신을 찾아가서 말했어, 나를 무시한 그를 제발 벌해주세요
소년이 다니는 깊은 샘물에 마법 걸어 물을 마시려 할 때 고갤 숙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잔잔했던 물에 비친 아름답고 신비로운 얼굴 하나
손을 뻗어보면 금세 사라지고 기다리면 다시 앞에 나타나는 얼굴
소년의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나의 손을 잡아줘 나는 네가 필요해
조금 더 가까이 듣고 보고 싶었던 소년, 물속에 빠져버려 깊이 가라 앉았어
내 심장이 아파와, 내 숨통이 조여와
내 모든 걸 다 줄게, 날 너에게 걸게
- 뮤지컬 <트레이스 유> 중 「어느 소년 이야기」
나르키소스 설화의 샘물은 곧 거울이며, <트레이스 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 ‘이우빈’과 ‘구본하’는 샘물에 비친 얼굴처럼 한 몸을 공유하는 두 자아다. 이 작품의 공연장에는 본 무대 아래에 한 단 낮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어느 소년 이야기」를 부르는 우빈이 이곳을 향해 손을 뻗기 때문에 흔히 ‘샘물’이라고 부른다. 배우에 따라서는 「어느 소년 이야기 Reprise」를 부를 때 직접 이 ‘샘물’에 들어가 본하와 손을 마주하기 때문에 더욱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다가온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처럼 우빈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본하의 곁을 지키며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진실을 감추고, 때로는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나르키소스로부터 유래한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자기애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설화 속 나르키소스가 사랑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샘물에 비친 얼굴’이었으며,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사랑한 것이 샘물에 비친 본인임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나르시시스트가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기보다 ‘이상화된 자기 자신’에 가깝다. 나르시시즘의 상당수는 오히려 자존감의 결핍으로부터 유래한다. 안정적인 자존감을 구축하지 못하기에 그 방어기제로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존경과 관심을 갈구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며,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열등감은 이상화된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의 괴리에서 온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거울 속 이상화된 자신을 사랑한 <팬레터>의 정세훈과 <더테일>의 존, <트레이스 유>의 우빈은 모두 나르시시스트, 자신이 아닌 자신을 사랑한 안타까운 나르시시스트다.
하루에도 몇 번을 마주하게 되는 거울이지만, 여러 작품을 접하며 거울이라는 소재가 품은 이야기들을 알게 된 후로 거울을 보는 일이 마냥 일상적이지만은 않게 되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저 모습은 과연 내가 맞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인격이 여러 개의 자아로 나뉘어 상황에 따라 우위를 점하는 자아가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스스로가 정세훈이나 존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예술과 문화는 삶을 다채롭게 한다는데, 그것은 문화생활을 위해 따로 빼둔 시간뿐만 아니라, 그 경험이 일상에 스며들어 평범한 하루를 평범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칼럼을 읽은 후, 문득 떠오를 때 거울 앞에 서서 정면을 찬찬히 바라보자. 익숙하고도 낯선 누군가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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