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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으로 전하는 매력, 발레 <백조의 호수>

문화

2022. 11. 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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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조의 호수> 중 왕자와 오데트, 그들을 지켜보는 악마.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줄거리

  화려한 왕성, 성년을 맞은 왕자 지크프리트를 위한 연회가 한창이다. 왕비는 왕자가 하루빨리 결혼하기를 바라지만,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왕자는 왕성의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연회가 끝나고 혼자 남은 왕자는 문득 자신을 몰래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인식하는데, 그것은 왕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왔던 악마이다. 왕자는 악마의 힘에 이끌려 어느 신비로운 호숫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백조 여인 오데트를 만난다. 오데트는 자신이 밤에는 사람으로, 낮에는 백조로 변하는 악마의 저주에 걸려 있으며 변치 않는 사랑만이 저주를 풀 수 있음을 알려준다. 오데트에게 첫눈에 반한 왕자는 그녀가 자신이 찾던 사랑임을 직감하고, 오데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다음날 왕성 무도회에서 왕비가 초대한 외국의 공주들이 춤을 추지만, 왕자는 오직 오데트에 관한 생각뿐이다. 그때 악마가 검은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인, 흑조 오딜과 함께 무도회에 나타난다. 왕자는 오데트와 똑같은 얼굴의 오딜을 보고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고, 오딜은 왕자와 함께 춤을 춘다. 왕자는 엄습하는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유혹하는 오딜의 춤에 매혹되어 그녀를 신부로 선언한다. 그 순간 어둠이 깔리고 슬퍼하는 오데트의 환영이 나타난다. 그제야 악마의 속임수를 알아챈 왕자는 오데트가 있는 호수로 달려가고, 악마가 그런 왕자의 뒤를 쫓는다.

 

오데트와 오딜

오데트와 오딜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푸른 달빛이 내린 호숫가, 하얀 옷을 입고 백조들 사이를 춤추는 오데트는 악마의 저주로 고통받는 탓인지 슬픔에 젖어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다. 반면 오딜은 왕성 무도회의 황금빛 속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춤을 추는데, 오데트와 정반대로 발랄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꿍꿍이를 감추는 듯 묘한 미소가 사람을 유혹하는 작은 악마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가진 오데트와 오딜은 사실 한 명의 발레리나가 1 2역으로 연기한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데트와 오딜이 1 2역이라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두 인물을 한 사람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두 인물이 똑같은 외모를 가졌다는 점, ‘오데트라는 이름이오딜과 같은 기원을 가졌다는 점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고뇌하는 왕자와 그를 뒤쫓는 악마. <사진 = 볼쇼이 발레단 제공>

  이에 따라 악마 역시 왕자의 어두운 면모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악마는 유독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추는 동작을 많이 취하는데, 이런 동작은 음침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악마가 왕자의 그림자에 숨어 언제나 그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양 신화에서운명은 외부가 아닌 사람의 내면에 숨어 삶의 중요한 순간 의심을 속삭인다고 전해진다. <백조의 호수>의 악마 역시 왕자의 운명이자 그의 내면의 속삭임이라는 묘사가 있다. 특히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차이코프스키의 「정경」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악마가 왕자를 호숫가로 유인하는 장면인데, 이때 왕자의 뒤편에서 그와 똑같은 동작으로 합을 맞추는 악마는 마치 두 인물이 하나의 존재임을 표현하는 듯하다.

 

발레의 묘미, 무언으로 전하는 매력

  발레는 대사가 없는 무언극(無言劇)이다. 무언극은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지 않으면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무대만으로는 저 인물이 왕자인지 왕인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사람인지 악마인지, 오데트가 왜 백조가 되어 호숫가에 사는지 눈치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레가 재미있는 이유는 대사 한 줄 없이도 전달되는 강한 인상 때문이다. 무언극이기 때문에 모든 연기를 몸짓과 표정만으로 전달해야 하는데, 그런 미묘한 차이가 주는 인상의 변화가 놀라울 만큼 뚜렷하다.

 

인물에 따른 다양한 복장들. 순서대로 광대, 왕성의 여자들, 백조.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복장 또한 인물의 역할과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소재다. 왕성의 광대는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저 방울은 광대가 등장할 때마다 고개를 익살스레 흔들어 명랑한 성격을 보여주는 데 쓰인다. 그는 왕실 광대답게 36회전 피루엣 등 주연만큼이나 어려운 동작을 선보이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의 톡톡 튀는 동작과 표정은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극의 분위기를 한층 밝게 만들어준다.

  외국의 공주를 포함한 왕성의 여자들은 드레스처럼 풍성한 종 모양의 로맨틱 튜튜를 입는 반면, 백조들과 오데트·오딜은 허리에서 수평으로 퍼지는 클래식 튜튜를 입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클래식 튜튜는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만큼 화려하고 역동적인 다리 동작이 많은 춤에 어울린다는 특징이 있는데, 특히 2막 네 마리 백조들의 춤과 3막에서 오딜이 추는 32회전 푸에테가 유명하다.

 

오딜의 32회전 푸에테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무언극 보다 쉽게 이해하기

  발레를 직접 감상해보면 무언극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러나 발레의 이야기를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요소는 ▲시선 ▲몸의 방향 ▲발레 마임이다.

  인물의 시선을 쫓아가면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알 수 있다. 왕자가 오데트를 처음 만났을 때, 왕자를 보지 않고 춤을 추는 오데트와 달리 왕자의 시선은 오데트만을 쫓는다. 두 사람의 춤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비로소 오데트의 시선이 왕자를 향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왕성의 연회에서 아름다운 외국의 공주들이 화려한 춤을 선보이지만, 오데트만을 생각하고 있는 왕자의 시선은 그녀들을 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딜이 등장하자 왕자의 시선은 오데트를 꼭 닮은 오딜을 향하는데, 그의 마음이 오딜에게 기울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신호다.

  몸의 방향 또한 중요하다. 두 인물이 함께하는 연기에서 몸의 방향은 갈등이나 화합을 나타내는 요소다. 왕비와 왕자가 결혼 상대를 정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을 때는 팔짱을 끼고 서로 등을 돌리는 반면, 갈등이 해결되고 나서는 나란히 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오데트와 왕자의 춤에서도 오데트가 처음 만난 왕자를 경계할 때는 몸의 방향이 서로 어긋나 있지만, 왕자의 사랑을 받아들인 다음 추는 파 드 되(2인무)에서는 두 사람의 춤이 한 방향으로 통일된다.

  발레에는 특정한 의미를 갖는 동작들이 있는데, 이를발레 마임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과 같은 발레 마임을 미리 알아 두고 가면 댄서들이 동작으로 말하는 바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발레 마임. <사진 = 영국로열발레단 제공, 그래픽 = 박재영 기자>

  1972년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에는 대사를 유성으로 삽입하는 기술이 없었다. 무성영화들은 대사가 적힌 화면을 장면 사이사이 띄우는 것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는데, 극의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대사를 최대한 줄여 대부분의 상황을 표정과 몸짓만으로 표현했다. <모던 타임즈> 등 잘 만든 무성영화를 보면 유성영화에 비해 대사가 현저히 적은 데도 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발레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연출과 배경, 댄서들의 섬세한 연기가 대사의 부재가 만드는 공백을 지워버린다. 오히려 무언극이기 때문에 그들의 미묘한 표정과 몸짓 연기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만으로 인물의 감정을 이해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 있다. <백조의 호수> 같은 고전 발레는 지루하다는 인식을 주기 쉽지만, 이런 숨은 재미에 집중하면 정적으로만 느껴졌던 무대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는 유리 그리고로비치 <백조의 호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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