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을 질병이 아니라 고유한 뇌 운영체제로 바라보는 신경 다양성
시스템 속 규칙을 찾아내는 ‘체계화 능력’, 자폐 성향과 통계적·유전적으로 연관
체계화 능력이 발달한 수학자·공학자 부모 사이 자녀는 자폐증일 확률 높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자폐 연구 센터 소장 사이먼 배런-코언(이하 배런-코언)이 낸 책 『패턴 시커: 자폐는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나』에서 자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화제가 되었다.
“자폐는 ‘질병’이 아니라 ‘다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남다른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이며, 덕분에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이 특별함은 바로 ‘체계화 능력’이다.”
이것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체계화 능력’과 ‘자폐’의 생물학적, 통계적 관련성을 제시하며 신경 다양성 담론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해 큰 주목을 받았다.
신경 다양성이란?
신경 다양성은 1990년대 자폐인 인권 운동에서 비롯되어, 후에 사회학자 주디 싱어가 정립한 개념이다. 이는 인간이 다양한 신경계를 가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이라는 단일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신경 발달 질환이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정상인’이 아닌 ‘신경 전형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현재 신경 다양성은 주로 자폐증과 ADHD 등에서 논의된다. 신경 다양성 관점에서 자폐증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정신 운영체제'로 이해된다. 자폐인들이 보이는 사회적 상호작용 장애나 반복적 행동 패턴은 '결함'이 아니라 신경 전형인과는 다른 정보 처리 방식의 결과로 해석된다. 즉, 신경 전형인과는 다른 자폐인만의 감각적, 인지적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본다.
배런-코언의 연구는 이런 신경 다양성 담론에 구체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는 자폐인을 '공감 능력'은 제한적이지만 '체계화 능력'은 뛰어난 운영체제의 일종으로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신경 전형인과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남들이 놓치는 패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체계화 능력과 자폐 성향의 상관관계, 다섯 가지 뇌 유형
배런-코언은 개인의 뇌를 다양화하는 두 축으로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을 제시했다. 공감 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체계화 능력은 시스템 속 규칙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비언어적 신호와 글의 숨은 의미를 잘 파악하고, 체계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기계 조작과 가설 설정에 능하다. 개인마다 이 두 능력의 발달 정도는 다르며,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에 따라 선호하는 활동, 사고방식, 대인관계 양식이 달라진다.
배런-코언은 67만 명을 대상으로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을 측정하는 자기 보고식 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뇌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모델을 제안했다.[i]
다섯 가지 뇌 유형을 나누는 기준은 공감 점수와 체계화 점수의 차이이다. 공감 점수가 체계화 점수보다 높은 사람은 E형(Empathizing), 반대로 체계화 점수가 더 높은 사람은 S형(Systemizing)으로 분류된다. 두 점수 간 차이가 특히 클 경우, 각각 극단 E형(extreme E)과 극단 S형(extreme S)으로 구분된다. 한편, 두 점수가 비슷한 경우는 B형(Balanced)으로 분류된다.[ii]
배런-코언에 따르면, 인구의 약 3%를 차지하는 극단 S형은 패턴 인식 능력이 탁월하여 수학적 규칙이나 시스템 작동 원리를 잘 파악한다. 하지만, 공감 능력이 평균보다 낮아 대화나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가 주목한 핵심은 자폐인이 극단 S형에 해당할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크다는 점이다. 조사 결과, 자폐인 집단은 대조군에 비해 S형과 극단 S형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또한 체계화 점수에서 공감 점수를 뺀 차이값은 자폐 특성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였으며, 성별 등 다른 인구 통계적 특성보다 19배 더 강력한 예측 변수로 나타났다.
과학자·공학자는 자폐의 언저리에 있다? – 체계화 성향과 자폐 성향 사이 공통 유전자
자폐가 부분적으로 유전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선행 연구들이 증명해 왔다. 전체 인구에서 자폐 진단을 받는 비율은 1~2%에 불과하지만, 형제가 자폐 진단을 받은 가족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자폐인일 가능성은 10~20%에 이른다. 쌍둥이 연구에서도 한쪽이 자폐증인 경우 다른 쪽도 자폐증일 확률이 이란성보다 일란성에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배런-코언은 체계화 성향과 자폐 성향 사이에 공통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했다. 2006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과학·수학·공학 등 체계적 사고를 중시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부모의 자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질 확률이 높다. 자폐 아동 집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공학 계열 직업군에 속한 비율은 대조군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더 구체적인 사례도 있다.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공학자 부부가 집중된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는 자폐 어린이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2배 높았다. 즉, '부모의 체계화 지능이 높을수록 자녀가 자폐인이 될 확률도 높다'라는 경향성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내 조사도 이 패턴을 뒷받침한다. 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형제자매 중 자폐인 비율을 조사한 결과, 인문과 학생들보다 9배 더 높은 수치를 보였다. 형제자매는 유전자를 50%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유의미한 결과다.
결정적 증거는 유전자 분석에서 나왔다. 체계화 점수를 측정한 5만 명을 대상으로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높은 체계화 점수와 관련된 유전자 변이 중 26%가 자폐 관련 유전자 변이와 상관관계를 보였다. 이는 고도로 체계화하는 성향과 자폐가 공통의 유전적 기반을 지닌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수치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고도로 체계화하는 성향의 원인 유전자 일부는 자폐의 원인 유전자 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목소리를 낸 자폐인 과학자들
책의 끝에서 배런-코언은 일부 자폐인이 과학과 기술, 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발명에 원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폐인 과학자가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직접 신경 다양성의 가치를 증명한 사례가 있다.
그중 잘 알려진 인물은 콜로라도 주립 대학교의 동물학 교수 템플 그랜딘(이하 그랜딘)이다. 그랜딘은 자서전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에서 ‘남들과 다른 뇌’로 인해 겪은 고충과 함께, 자신만이 할 수 있었던 특별한 통찰을 공유한다. 언어보다 그림으로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그랜딘에게 독특한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했고, 그 덕분에 인간보다 동물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랜딘은 이 능력을 활용해 동물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사육장을 설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사례로 『Explaining Humans』(한국 번역서 제목: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를 쓴 카밀라 팡이 있다. 카밀라 팡은 현재 생물정보학 분야에서 연구 중인 생물화학 박사이며, 8살에 자폐스펙트럼장애를, 26살에 ADHD를 진단받았다. 카밀라 팡의 책에는 자폐인이 사회 안에서 겪는 내적 충돌과 외부 세계와의 불협화음이 담겨 있다. 그는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어려움, 자동적 공감 능력의 결여, 모호한 암시를 해석하지 못해 겪는 곤란 등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이런 카밀라 팡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어준 것은 인문학이 아닌 과학이었다. 카밀라 팡은 극도로 예측 불가하고 비논리적인 인간의 행동과 감정과 사고를 논리적인 과학적 모델에 빗대어 해석했다. 예의범절을 지키는 방법을 에이전트 기반 모델링을 통해 익히고, 사람들이 협업하는 과정을 세포 속 단백질의 상호작용에 빗대어 이해했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는 독자적인 방식을 스스로 개척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자신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다.
배런-코언이 제시한 통계적 근거와 자폐인 과학자의 사례들은 자폐를 오직 질병이나 결함으로만 보던 전통적 시선에 대항한다. 이 주장은 자폐를 인간 정신의 또 다른 작동 방식으로, 나아가 인류 문명의 진보에 이바지한 중요한 지적 자산으로 재정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위험도 있다. 자폐를 '특별한 능력'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체계화 능력이 뛰어나고 생산적인 자폐인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또한 '자폐는 장애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자폐인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을 외면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후속 기사에서는 이 문제들을 다루며, 나아가 배런-코언의 연구 결과가 가진 윤리적 의미를 새롭게 제안한다.
김신지 기자 sjneuroneurony@dgist.ac.kr
박재윤 기자 dgist1001@dgist.ac.kr
[i] D.M. Greenberg, V. Warrier, C. Allison, & S. Baron-Cohen, Testing the Empathizing–Systemizing theory of sex differences and the Extreme Male Brain theory of autism in half a million people, Proc. Natl. Acad. Sci. U.S.A. 115 (48) 12152-12157, https://doi.org/10.1073/pnas.1811032115 (2018).
[ii] 다섯 뇌 유형 공식 테스트는 www.yourbraintype.com에서 직접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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