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와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무대에 불이 켜지고 단정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 보이지만 두 눈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돈 파블로 맹인학교, 이곳의 모든 학생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선천성 전맹이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학교를 이끄는 도냐 페피따뿐이다. 도냐 페피따가 가르친 ‘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학생들은 장애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앞을 보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그나시오라는 학생이 입학하며 모든 것이 변한다. 비관적인 이그나시오는 자신은 불쌍한 장님이며 앞을 못 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주장하여 다른 학생들과 갈등을 빚는다. 학생들은 이그나시오를 쫓아내려 하지만, 모범생이자 학생들의 리더 격인 까를로스와 후아나는 우리가 이그나시오를 변화시킬 수 있다며 그에게 학교에 남을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리어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간다. 단정했던 교복은 흐트러지고,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고, 어둠을 두려워하며, 학교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는다.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까를로스와 후아나는 이그나시오를 남게 한 것을 후회하며, 그가 스스로 학교를 떠나게 만들기로 결심한다.
비정상성이라는 반동분자
이그나시오: 난 이곳에 혼란을 가져오게 될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그나시오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유지되어 온 돈 파블로 맹인학교라는 체제의 완벽한 반동분자다. 그는 학교가 가르치는 ‘철의 정신’을 부정하고 도냐 페피따와 대립하며 자신의 비관적인 사상을 주위에 퍼뜨린다. 그에게 “이곳의 모든 즐거움은 위선, 거짓”이며, 학생들은 자신의 비극을 외면한 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강요하는” “헛된 환상에 젖은 몽상가들”이다.
이그나시오: 난 오히려 그들의 외침이 이 학교의 나태한 환상보다 더 진실하다고 믿어. 결코 자신들이 정상이라 믿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이그나시오는 사회의 ‘비정상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학생들이 그간 배워온 가치(“우리는 바깥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를 부정하고, 학교가 요구하는 ‘행복한 모습’을 거부한다. 혼자만의 태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런 감정을 퍼뜨리기까지 한다. 학생들이 그의 등장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그나시오와 룸메이트가 된 미겔린은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나까지 우울해지는 것 같다”라며 진저리를 친다.
하지만 이그나시오의 등장, 즉 비정상성의 출현이 강한 반발에 부딪히는 것은 단지 그 영향이 부정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돈 파블로 맹인학교라는 체제가 구성원들에게 정상성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은 강인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학교의 가르침, ‘철의 정신’이다. 학교는 이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학생을 용서하지 않으며, 집단의 사상에 반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가혹하다.
세뇌에 가까운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가르침은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연상시킨다. 불가능한 희망을 품지 않도록 교육받기에 삶에 만족한다. 불행을 느끼려는 즉시 소마라는 약을 먹어 언제나 행복을 유지한다. ‘멋진 신세계’도 책 밖 독자에게는 디스토피아지만 책 속 인물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획일화된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모든 개인을 교정 혹은 제거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는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맹인 학생들에게 돈 파블로 맹인학교는 유토피아다. 그 안의 사람들은 행복하지만, 그 유토피아는 결코 실존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의 세뇌가 완벽하지 못했듯이,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가르침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 단 한 명의 비정상성만으로도 깨져버릴 만큼 얄팍한.
미겔린: 우린 그동안 속고 살아왔는지도 몰라. 세상은 이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저 바깥 세상에서도 지팡이 없이 여기에서처럼 똑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이 바보 같은 낙관주의가 문제였던 거야.
학교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이미 이 학교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지팡이 없이 다닐 수 있는 것은 학교 내 모든 사물이 정해진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의자 하나라도 위치가 바뀌면 학생들은 혼란에 빠진다. 까를로스조차 바깥 세상에서는 지팡이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학생들은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지 않는다”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문장을 말한다. 다른 학생들이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이그나시오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앞을 보고 싶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가장 비관적인 이그나시오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그나시오: 난 앞을 보기를 원해. 그 외엔 어떤 것도 날 만족시키지 못해. 내 이런 갈망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또 다른 모순은 도냐 페피따다. 작중 도냐 페피따는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에게 흔들리는 모습에 불안을 느끼고 까를로스를 이용해 이그나시오를 학교에서 내보내려 하는데, 이때 까를로스를 설득하며 아래와 같은 말을 한다.
까를로스: 모두들 이그나시오의 신비로움에 도취되어 있어요. 그가 말하는 빛에 대해.
도냐 페피따: 그들이 빛에 대해 뭘 알지?
까를로스: 모르기 때문에 더 끌리는 게 아닐까요.
도냐 페피따: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의 모든 형태와 색들을 전부 보고 있어.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실이지?
까를로스: 당연히 도냐 페피따입니다.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신념, 맹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철의 정신’은 정작 맹인이 아닌 도냐 페피따에 의해 정당화된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빛을 볼 수 있는 도냐 페피따가 없었다면 까를로스가 그토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작중 이그나시오의 말처럼, 돈 파블로 맹인학교는 그저 도냐 페피따라는 지팡이를 얻은 것뿐이다.
반론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
돈 파블로 맹인학교라는 집단이 가진 모순은 그 집단 구성원의 방어적 태도를 유도한다. 집단의 이념이 불안하기 때문에 작은 의심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취약한 사상일수록 반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의 사상에 휩쓸리는 모습을 목격한 까를로스와 도냐 페피따는 학교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이그나시오와 대립한다. 그러나 이 대립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그나시오를 패배시켜 집단에서 추방하려는 형태로 나타난다.
까를로스: 누가 더 옳은지 모두가 판단해 줄 거야.
이그나시오: 난 너희 모두를 존중해.
까를로스: 난 네가 비관주의에 빠져 사는 거 전혀 상관없어. 하지만 대체 무슨 권리로 그 더러운 생각을 다른 사람들한테 전염시키려는 건데?
이그나시오: 너는 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강요해? 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그나시오만큼이나 까를로스 역시 자신이 따르는 학교의 이념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까를로스는 아예 직접적으로 “모든 게 환상이고 그림자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고 말한다.
아이들: 그게 너의 불행이야, 까를로스. 이그나시오가 가져온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것. 너도 이제 받아들여! 이그나시오가 우리에게 가져온 이 믿음을!
까를로스: 빛이니 시력이니 다 허망한 말들이야. 우린 장님이야! ...그래, 차라리 그 말을 받아들일게.
이그나시오: 드디어 인정했네. 넌 단지 앞을 못 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줄곧 “우리는 장님이 아니라 단지 앞을 못 볼 뿐”이라고 주장하던 까를로스는 마침내 이그나시오처럼 ‘우리는 장님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만다. 이 말을 할 때 까를로스는 마치 억눌러온 것을 터뜨리는 듯, ‘결국 말해버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까를로스뿐만 아니라 후아나 또한 “넌 나와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 해. 불행을 덮는 거짓과 맞서 싸우고 싶어 하지.”라는 이그나시오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아나는 결국 친구 엘리사에게 “너 지금 흔들리고 있어.”라는 말을 듣고 폭발한다. 애써 외면해 왔지만, 까를로스도, 후아나도 이그나시오가 헤집는 모순, 다시 말해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었다. 이그나시오는 학생들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마음속에 묻어뒀던 생각을 꺼낸 것이다. 그는 방 안의 코끼리를 보며 “이 코끼리는 뭐지?”라고 처음 말해버린 사람이다. 이그나시오는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동분자이자, 외면해 온 진실을 깨닫게 하는 빨간약이다. 그의 이름(Ignacio)은 라틴어로 불을 뜻하는 ‘ignit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점화하다’라는 뜻을 가진 ‘ignite’의 어원이기도 하다.
쓴 진실과 남은 불꽃
그러나 환상에 안주해 온 이들에게 이그나시오가 들쑤시는 진실은 삼키기에는 너무 쓴 것이다. 학교의 이념을 지켜야 하는 도냐 페피따는 까를로스에게 “예수를 처형한 건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가 구하고자 했던 그의 동족들, 유대인들이었다”라며 이그나시오를 학교에서 내쫓도록 까를로스를 부추긴다. 도냐 페피따가 예상치 못한 한 가지는 까를로스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이그나시오에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흔들림이 거셀수록 그에 대한 방어 행동도 강해진다. 결국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가 단둘이 만난 밤, 이그나시오는 추락사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이그나시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한 학생들은 이내 ‘이그나시오는 우리처럼 되고 싶어서 지팡이 없이 걷는 연습을 하다 죽은 것’이라는 미겔린의 주장에 동조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어떤 학생들은 ‘이그나시오에게는 이편이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도 한다. 이그나시오의 죽음을 유일하게 목격한 도냐 페피따는 까를로스와 함께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만 본다. 곧 상황이 정리되고 학생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도냐 페피따와 까를로스만이 남는다. 진실을 파헤치던 사람의 결말을 눈앞에서 목격한(비록 목目격하진 못했지만)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의 죽음 직후 너무도 쉽게 생각을 바꾸는 친구들을 보며 환멸을 느끼는 듯 외친다.
까를로스: 그럼 똑똑히 보셨겠네요. 이그나시오의 죽음 앞에 한때 그를 따랐던 아이들이 보인 모습을. 모두들 그의 시신 앞에서 수군거리다 떠나버렸어요. 마치 자기들이 그를 동정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면서요. 비참하고 불쌍한 장님들 주제에!
이그나시오에게 동조하던 학생들이 등을 돌린 가운데, 까를로스만은 그가 어떤 진실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 누구보다도 이그나시오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대척점에 있던 까를로스다. 혼자 남은 까를로스는 어둠만이 가득한 허공을 바라보며 ‘우리가 장님이 아니었다면...’ 상상한다. 앞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이그나시오처럼. 이그나시오가 까를로스의 내면에 일으킨 불꽃은 이그나시오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집단인가
돈 파블로 맹인학교에서 눈에 띄는 점 한 가지는 학생들과 도냐 페피따가 ‘학교의 명예’를 무척이나 중시한다는 점이다. 후아나는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이그나시오를 붙잡고, 도냐 페피따는 “학교의 실패로 비치지 않게” 이그나시오가 조용히 스스로 학교를 떠나도록 만들라고 까를로스를 부추긴다. 극중 도냐 페피따가 학생들의 교복 가슴팍에 새겨진 학교의 상징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마치 지배자인 도냐 페피따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학교의 권력관계는 단순히 지배자-피지배자의 구조가 아니다. 학교라는 체제 속에서는 도냐 페피따조차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도냐 페피따는 이그나시오의 최후를 목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라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이그나시오가 죽고 다른 학생들이 돌아간 후, 도냐 페피따는 황망함을 숨기지 못한 채 까를로스에게 말한다.
까를로스: 선생님께서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요. 하지만 그 추측은 사실이 아니에요.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아요.
도냐 페피따: ...맞아, 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이그나시오는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설사 네가 뭔가 했고 내가 그걸 봤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어.
그런 도냐 페피따를 비웃듯이 까를로스는 말한다.
도냐 페피따: 내가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괴롭긴 처음이다.
까를로스: 아니요. 선생님은 볼 수 없어요. 이곳에선 그 누구도 볼 수 없어요. 뭔가를 봤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면 그건 본 게 아니죠.
돈 파블로 맹인학교라는 집단,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건 도냐 페피따 역시 예외가 아니다. 도냐 페피따는 학교의 명예를, ‘철의 정신’이라는 이념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아야 한다. 학교를 대표하는 모범생인 까를로스를 살인자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이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집어삼키고 있다면, 그 집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정상적이고 행복하다는, 아니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의 이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나 있는 비정상성을 억누르고 퇴출해 얻어낸, 불안한 평온일 뿐이다.
이런 정상성의 강요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익숙하게 나타난다. 사실 완벽한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비정상성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사회는 아주 흔하다. 어쩌면 그것은, 비정상성을 논하다가 자신의 비정상성이 드러나 사회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는 방어 심리에서 비롯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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