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인용구는 가독성을 위해 일부 축약 및 재구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요즘 시대에 역사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퍼포먼스고 오락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배경
1980년대 영국 북부 쉐필드 고등학교,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옥스브릿지(Oxbridge) 역사반 학생 포스너, 데이킨, 스크립스, 럿지, 락우드, 악타, 팀스, 크라우더가 낭만적인 괴짜 문학 교사 헥터의 수업을 듣고 있다. 헥터는 ‘일반교양’으로 불리는 자신의 수업을 ‘시간 낭비’로 명명한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은 “사회적 성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입 준비에도 큰 관심이 없는 헥터는 자신들이 장학생 후보고 옥스포드, 캠브릿지 갈 애들이니 존중해달라는 데이킨의 말에 충격받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헥터: 작년을 끝으로 우리는 좀 덜 번쩍번쩍한 학교에 지원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옥스포드, 캠브릿지는 잊어버려! 거긴 도대체 왜 가고 싶니?
락우드: 유서 깊은 학교잖아요. 시험과 검증을 거쳤고.
헥터: 아니, 다른 애들이 다 가니까 가고 싶은 거야. 불티나게 팔리는 티켓이니까. 입석밖에 안 남았거든.
그런 헥터와 달리 교장은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쉐필드 고등학교는 몇 년째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 합격생을 내지 못한, 소위 ‘별 볼 일 없는’ 학교에 불과하다. 교장의 목표는 쉐필드 고등학교를 ‘대학 잘 보내는 명문 학교’의 반열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해는 유독 똑똑한 학생들이 많다. 따라서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 합격생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은 것이다. 기존의 교사 린톳과 헥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교장은 대입 준비를 위해 옥스포드 출신의 보충 교사를 들이는데, 그가 바로 어윈이다.
교장: 장학금을 따 주세요. 학교 랭킹을 올려주세요. 그러면 그 자리는 선생님 겁니다.
어윈의 수업: 역사는 저널리즘이다
어윈: 지루해. 지루해. 끝이 없을 정도로 지루해. 네가 이겼다… 제일 지루해. 틀렸다고 안 했어. 지루하다고 했지. (중략) 비슷비슷한 에세이를 60개, 100개 읽느라 죽을 맛인 심사위원들을 생각해 봐. 예수의 음경 포피 열네 조각은 한 줄기 햇살 같이 느껴질 거다.
어윈은 첫 수업에서 학생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위와 같이 평가한다. 린톳의 수업에서 사실들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적절하게 구성하면 충분하다고 배워왔던 아이들이 당황하자, 어윈은 “이대로라면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을 잘 알고 서술할 수 있는 학생 수보다 옥스포드와 캠브릿지 신입생 정원이 적기 때문이다.
어윈: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만족스러운 결과에 있었다는 것이다.” 1등급. 브리스톨, 맨체스터, 리즈에서도 너희를 환영할 거다. 그렇지만 나는 옥스포드 막달렌 컬리지 교수고 지금까지 똑같은 얘기를 한 에세이를 70개나 읽었기 때문에 이미 곯아떨어졌다.
어윈이 가르치는 기술은 익히 알려진 사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기존의 틀을 깨는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예시로 어윈은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대한 독일의 불만에 의해 일어났다’는 익숙한 관념을 깨고,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군비확장 경쟁은 영국에서 조장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우리 국민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부는 우리 책임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어윈의 주장을 듣는 학생들은 흥미로워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띤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이 주장을 펼치는 어윈이 실제로 자기 주장을 진실이라 믿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는 역사의 진실보다 주목성이 더 중요하다. 학생들 중 스크립스는 어윈이 논하는 ‘역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스크립스: 논쟁을 위한 논쟁. 믿지도 않는 말을 하는 것. 그건 역사가 아니야, 저널리즘이지.
어윈: 와인 시음회에서 갈증이 중요한가? 스트립쇼에서 패션이 중요해? 마찬가지로 시험에 있어서 진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크립스: 나중에 어윈이 유명한 역사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소의 반대쪽에 앉는 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었어요. 기정사실화된 역사적 사건을 놓고 그 반대를 증명해 보였던 겁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인해 낮잠을 방해받은 것은 사실 일본인들이었으며 진정한 범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이라는 얘기를 해서 난리가 났었죠. 논지를 찾고, 그걸 뒤집고, 그 다음에 증명할 근거를 찾는다. 그게 바로 어윈의 테크닉이었어요.
이 극은 40대의 어윈이 20여 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회상에서 잠시 되돌아온 현재 시점, 어윈은 여전히 자신의 기술을 활용하여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역사가로 활동한다. BBC 역사 프로그램을 촬영하며 ‘헨리 8세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수도원의 본 목적이었던 물질주의의 탈피를 이루었으므로, 헨리 8세 덕에 수도원은 그들의 목적과 이상의 극치를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감독이 “좋아요. 이상의 극치는 너무 간 것 아닌가요?”라고 묻자 어윈은 웃으며 대답한다. “시청률 올려야죠.”
시험을 위한 공부, 인생을 위한 공부
어윈이 보충 교사로 임용된 목적은 학생들을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에 합격시키는 것이다. 어윈은 그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학생들에게 대입 전략을 가르친다. 그는 경쟁 대상인 다른 학생들을 “단 한 번의 경주를 위해 훈련된 종마”라고 말하며 “그 애들과 비교하면 너희 중에 희망이 있는 놈은 아무도 없다”라고 평가한다. 그런 그가 가능성을 찾은 곳은 학생들이 헥터에게 배운 수많은 시다.
팀스: “옛날의 화가들은 고통에 대해 결코 틀리지 않았다. 고통이 어떻게 누군가는 밥을 먹거나, 창문을 여는 순간에 벌어지는지…”
어윈: 헥터 선생님이랑 한 거니? 방금 그 시. 인용한 거잖아, 오든(W. H. Auden).
팀스: 제가요? 어떨 때는 자동적으로 나와요. 너무 많아서 흘러넘치는 거죠.
어윈은 학생들이 심장으로 외우고 있는 수많은 시를 인용하여 역사를 서술하면 ‘면접관이 졸지 않고 읽을만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헥터에게 배운 것들을 시험에 사용하는 데 거부감을 보인다. 헥터의 수업은 시험이 아니라 자기들을 더 전인적인 인격체로 만드는 게 목적이며, 따라서 그 시들을 시험에 쓴다는 것은 신뢰를 배반하고 영혼을 발가벗기는 짓이라는 것이다.
어윈: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공부한 내용은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시험에 관한 한 말이죠.
헥터: 나는 시험이라는 것들이 모두 교육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육 자체가 교육의 적이지요. 그렇지만 도움이 된다면 학생들에게 말을 하겠습니다.
어윈: 감사합니다. 저도 시험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이니까요. 선생님이 가르치신 그 발췌문들을 잘만 쓰면 저울을 기울게 할 수 있습니다.
헥터: 뭐라고요, 발췌문? 내가 발췌문을 가르쳤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논지를 만들기 위해 생각 없이 마구 던질 수 있는 인용구들? (중략) 모든 답안이 적당한 발췌문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같겠네요. 하지만 그것들은 심장으로 배운 것들입니다. 있어야 할 곳도 (심장을 가리키며) 여기고요. 그걸 오염시키면 안 됩니다.
어윈: 그러면 아이들이 그걸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육이라는 건 머리가 하얗게 세서 난롯가에 앉아있을 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시험이 다음 달입니다.
헥터: 그럼 시험이 끝난 다음에는요? 삶은 계속됩니다. 발췌문이라니…
그러나 학생들은 점점 어윈의 방식에 익숙해진다. 특히 학생들 중 가장 똑똑하고 어윈을 마음에 들어 한 데이킨은 그의 교육을 빠르게 흡수한다. 그러던 중 교장의 지시로 헥터는 어윈과 합동 수업을 하게 되고, 헥터의 ‘인생용’ 교육과 어윈의 ‘입시용’ 교육이 불가피하게 충돌한다. 합동 수업 첫날, 어윈이 꺼낸 주제는 ‘홀로코스트’다. 헥터는 홀로코스트는 가르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시험지 문제도 어떻게 해도 적절할 수 없고, 답을 어떻게 써도 그들이 받았던 고통의 의미를 손상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어윈의 방식을 따라 홀로코스트라는 문제를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하고, 맥락 속에 넣어보고,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데이킨: 만약 히틀러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문제가 나오면, 선생님 방식으로 생각해서, 히틀러가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아니고 지도자였다고 한다면요? 어쨌거나 전통적인 독일의 외교정책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책을 실행했고… 그렇게 볼 때 수용소 역시 이 정책의 연장선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어윈: 내 생각에… 그건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우선 그건 진실이 아니고…
스크립스: 그렇지만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나요? 이 시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실이,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인 것일 뿐이고 다른 시각에 도달하기 위해서 쓰이면 그뿐이다.
헥터: 왜 그냥 그 수용소들이 전무후무한 비극이었다고 비난하면 안 됩니까?
락우드: …점수를 얻을 수가 없잖아요. 다들 그렇게 쓸 텐데. 뻔한 답이잖아요.
헥터는 사람의 죽음이 단순한 언어의 생략적 표현으로 축소되는 현실에 절망한다. 학생들 중 유일한 유대인인 포스너는 뭔가를 맥락 속에 넣어보는 건 그게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설명될 수 있다면 다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항의한다.
데이킨: 그렇지만 홀로코스트를 맥락 속에 넣어보면 ‘수도원 해산’이랑 다를 게 없어.
포스너: 그래, 그렇지만 수도원 해산 때문에 내 친척들이 죽지는 않았거든.
어윈: 좋은 지적이다. 하지만 이건 역사야. 거리를 두고 봐.
이후 포스너는 가족들에게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가 삼촌에게 맞는다. 포스너의 부모가 보낸 항의 편지로 교장에게 지적받은 어윈은 포스너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다.
어윈: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너무… 몰입시키지 않으려 하다 보니. 홀로코스트는 아직은 거리감을 둘 수 있는 질문이 아닌데.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되겠지만.
포스너: 선생님, 자꾸 얘기 꺼내서 죄송한데요. 만약 시험 문제로 홀로코스트 얘기가 나오면,
어윈: 놀래켜 줘. 넌 유대인이잖아.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훨씬 빠져나갈 구멍이 많지.
포스너: 시험 답안을 집으로 보내지는 않죠?
어윈의 말처럼, 나중에 포스너는 캠브릿지 대학 면접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담담하게 답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다.
포스너: 저의 소위 ‘중립적 태도’를 칭찬하더라고요. 그게 역사 저술의 기본이래요.
…전 잘한 것 같아요.
학교와 사회의 굴레
극중 어윈과 헥터의 교육 방침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윈이 헥터가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윈이라고 처음부터 역사를 저널리즘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인물이었을까? 그 역시 한때는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어윈: 옛날에는 그런 상상도 했어요. 연구를 해서 깜짝 놀랄 발견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서, 그걸 그 인간들 면상에 던져주겠다.
린톳: 옥스포드에? 관심도 없을걸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아요. 돈 버는 것, 그게 그 사람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거죠. 돈 많이 벌어서 그 인간들한텐 한 푼도 주지 마세요.
<히스토리 보이즈> 속 학교는 이상적인 배움의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배움과 차가운 돌 냄새를 혼동하는 곳”이고, 그들이 제시하는 입시 면접 문제만큼이나 저널리즘에 치중하는 곳이다. 역사반 학생 중 성적이 가장 부진했던 럿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에 합격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럿지의 아버지가 그곳의 청소부로 일했기 때문이다. “청소부의 아들이 학부 학생으로!” 학교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 럿지가 채택된 것이다.
헥터는 어윈에게 “그럼 시험이 끝난 다음에는요? 삶은 계속됩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이란들 무엇이 다를까? 그런 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이 졸업하여 만든 것이 그들이 살아갈 사회일 텐데.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에 맞춰 학교가 학생들을 교육하고, 그 학생들이 자라 다시 사회를 구성한다. 학교와 사회 사이의 돌고 도는 굴레다.
헥터: 이제 마무리하시죠, 친절한 부인. 밝은 날은 갔으니 이제 어둠을 준비해야죠.
어윈: 헥터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헥터처럼 가르칠 시간은 없습니다.
‘캡틴’ 없는 <죽은 시인의 사회>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에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오마주가 다수 등장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된 내용은 명문 고등학교 웰튼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신비로운 교사 존 키팅의 교육을 받으며 비밀 문학 클럽 ‘죽은 시인의 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문학 클럽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까닭은, 이 클럽의 정회원은 죽어서만 될 수 있으며 산 사람은 준회원으로서 평생 시를 쓰는 견습 기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악타는 헥터의 수업을 “죽은 사람들과 함께 빵을 나누는 것”이라 표현한다. 또 <죽은 시인의 사회>의 유명한 장면 중 키팅이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 걷게 하는 장면이 있다. 키팅이 “자유롭게 걸어라. 전통과 형식에 도전해라”라고 가르치자, 돌턴이라는 학생은 “저는 스스로에게 걷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키팅은 그 답변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한다. <히스토리 보이즈> 중 어윈과 포스너의 대화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어윈: 포스너, 반대하는 습관을 좀 기르도록 해. 너는 지나치게 순종적인 경향이 있어.
포스너: 네, 선생님. 아니, 싫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히스토리 보이즈>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의도적으로 비튼 듯 보다 냉소적이고, 씁쓸하고, 현실적이며 불편하다.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는 판타지라며 비웃는 것 같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는 <죽은 시인의 사회> 학생들과 달리 <히스토리 보이즈>의 배경은 평범한 지방 고등학교다. 이러한 배경의 차이 속에서 학생들은 현실의 세상이 문학과 다름을 일찍이 깨닫는다.
포스너: 헥터 선생님한테 갔으면 뭔가 인용구를 주셨겠죠. 하우스만 같은. 문학작품이 약이고, 지혜고, 반창고고, 모든 것이라고. 그치만 아니잖아요.
두 작품의 또 다른 차이점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에 관해 논하는 부분이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키팅과 동료 교사 매컬리스터의 대화로, <히스토리 보이즈>에서는 린톳의 대사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중
매컬리스터: 아이들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부추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존. 자신이 렘브란트도 셰익스피어도 모차르트도 아니라는 걸 알면 선생님을 싫어하게 될 테니.
키팅: 예술가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매컬리스터: 17세에 스스로 생각을?
키팅: 재미있군요. 부정적인 분인 줄 몰랐네요.
매컬리스터: 아니요, 현실적인 겁니다. “어리석은 꿈에 얽매이지 않는 심장을 보여다오. 그러면 행복한 사람을 보여줄 테니.”
키팅: “그러나 꿈속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늘 그러했고 그러할 것이다.”
<히스토리 보이즈> 중
린톳: 제가 70년대 런던에서 교편 잡고 있을 때요, 공부 못하는 애들은 언젠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위로를 주는 신화가 있었어요. 교과 과목을 반도 제대로 이해 못 한 녀석들이 자기는 예술이든 뭐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졸업을 했어요. 지금도 감옥에 있는 죄수들 셋 중 하나는 자기가 빈센트 반 고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의도만 좋은 거짓말 아닌가요? 심장으로 배운다는 게 도대체 뭐예요? 아이들이 결국 실패할지도 모르니까 보험 들어두는 것 아니에요?
키팅은 학생들에게, 비록 어리석은 꿈이라 해도 자기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꿈꾸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린톳은 예술가가 된다는 꿈은 공부 못하는 애들을 위로하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좋은 대학에 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버는 소위 ‘사회적 성공’을 이루지 못한 아이들의 원망을 피하기 위해, “너는 언젠가 예술가가 될 수 있어”라는 거짓 희망을 심어주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꿈속에 사는 듯한 키팅의 말을 비웃는, 더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서술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존 키팅이라는 인물을 통해 완벽한 스승으로서의 교사를 그린다. 학교를 떠나는 키팅의 뒤에서 책상 위에 올라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와 달리 <히스토리 보이즈>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캡틴’은 없다. 교사는 그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난 사람일 뿐이다.
린톳: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힘든 게 선생님도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으로서는 ‘나도 사람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게 가장 힘들어요.
<히스토리 보이즈> 속 교사가 완벽한 스승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의 불완전성을 넘어, 그들이 가진 허물로서 드러난다. 헥터는 그간 학생들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다니면서 성추행을 해온 사실이 발각되고, 어윈은 옥스포드에 면접을 치러 가서 졸업생 명단을 본 데이킨에게 학력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들킨다. 학생들은 그들의 허물을 보며 교사가 자신들의 ‘캡틴’이 아님을 깨닫는다. 때문에 <히스토리 보이즈>의 학생들이 교사에게 갖는 감정은 존경보다는 일말의 동정과 조소에 가깝다. 자신들이 피해자의 입장임에도 헥터의 성추행 사실을 무심히 넘겨버릴 정도다.
스크립스: 이제 더 이상 낙엽 깔린 교외 도로를 달리면서 성기 마사지 받는 일은 없겠구나.
데이킨: 내가 여자를 좋아하긴 해도, 여자들도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그렇게 어설프게 주물럭거리는 걸 매일 받아줘야 한다니. 우리,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걸까?
스크립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프루스트 같은 천재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지.
희망 없는 미래
<히스토리 보이즈>가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가장 대비되는 점은 그 결말이 품은 가능성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은 교장의 압박으로 학교를 떠나지만, 맥컬리스터는 키팅처럼 학생들에게 교정을 걷게 하며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들의 학교에 변화가 일어날 희망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이다. 이와 달리 <히스토리 보이즈> 속 학생들의 미래에 희망적인 가능성은 없다. 결말부에서 린톳은 어른이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누군가는 판사와 교장이, 다른 누군가는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 학생들 중 가장 똑똑했던 데이킨은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돈 많이 받는 대가로 거짓말 해 주는” 세금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어윈의 저널리즘을 비판했던 스크립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 캠브릿지를 졸업한 포스너는 “헥터가 가르친 모든 것을 가슴에 새긴 채” 직접 개조한 오두막에 직업 없이 혼자 은둔하며 산다. 그들의 미래는 다른 가능성 없이 꽉 닫힌 결말이다. 작중 수차례 반복되는 ‘전환점’, ‘역사가 여러 가능성을 두고 덜컹거리는 순간들’이라는 묘사와는 대조적인 끝이다. 그렇게, 그들의 역사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가고 잊힐 뿐이다.
헥터: 넘겨줘라. 때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받아서, 느껴보고, 넘겨주는 거지. 날 위해서도 아니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어느 곳 누군가에게 어느 날, 넘겨주는 거다. 나는 너희가 바로 그 게임을 배우길 바랐다. 넘겨줘라.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2004년 발표된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13년 초연 이래 10년간 7차례에 걸쳐 상연되었다. 불편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 태도, 냉소적인 표현들, 씁쓸한 유머, 수많은 문학작품과 역사적 사건이 인용된 풍부한 각본으로 매 시즌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대학 입시와 공부, 시험이라는 주제가 친숙할 학생들에게는 특히 와닿는 점이 많을 것이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다음 시즌이 돌아온다면, 꼭 한 번은 관람하기를 권한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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