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와 페르세포네
그리스 신화 속 봄과 여름의 여신 페르세포네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당해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가 지상을 그리워하자 하데스는 그녀에게 석류를 먹이고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저승의 음식을 먹은 자는 지하세계에 귀속된다는 법칙 때문에 페르세포네는 일 년의 반은 지상에서, 나머지 반은 지하에서 하데스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페르세포네가 지하에 머무는 동안은 황량한 계절이, 그녀가 지상에 있는 동안은 꽃과 열매가 가득한 풍요의 계절이 되었다고 한다. 하데스의 납치에 의한 강제 결혼이었다는 전승과 달리 일각에서는 페르세포네 역시 하데스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고도 하는데, <하데스타운>은 후자의 전승을 택하고 있다.
줄거리
춥고 황량한 겨울, 지옥으로 가는 기차를 배경으로 헤르메스가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망자를 안내하는 신이자 <하데스타운>의 해설자로서 작품에 등장하는 신과 인간들을 관객에게 소개한다(「Road to Hell」). 뮤즈의 아들이자 작곡가, 가난하지만 신비한 소년 오르페우스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돌던 에우리디케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에게 청혼한다. 에우리디케는 갑작스러운 청혼과 가난한 처지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지만, 오르페우스의 진심이 담긴 노래와 그 노래가 피워낸 한 송이의 붉은 카네이션을 받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때 마침내 페르세포네가 여름이 담긴 가방을 들고 지상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무거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햇볕 아래서 술과 음악으로 가득한 축제를 즐긴다(「Live It Up」). 그러나 여름의 기쁨도 잠시, 약속한 6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 하데스가 기차를 타고 페르세포네를 데리러 온다. 너무 일찍 왔다는 페르세포네의 질책에도 그저 “보고 싶었어”라 대답한 하데스는 그녀와 함께 지하로 떠나버리고 지상은 다시 겨울을 맞는다(「Way Down Hadestown」). 오르페우스는 여름이 이토록 짧아지고 지상이 황량해진 것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임을 깨닫고, 그들의 사랑을 되돌릴 노래를 만드는 데 전념한다. 그러나 작곡에 열중한 오르페우스는 가난과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에우리디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에 지친 에우리디케는 지하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하데스의 유혹에 넘어가 지옥행 기차에 올라탄다. 하데스와의 계약으로 지하의 인부가 된 에우리디케는 인간성을 잃고 기계처럼 일하는 지하 사람들의 모습과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한편, 뒤늦게 에우리디케의 부재를 깨달은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홀로 저승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에 오른다.
에우리디케 인물 해석
에우리디케는 몽상가인 오르페우스와 달리 염세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본래 성격이라기보다 현실에 치여가며 얻게 된 냉정함에 가깝다. 「Wedding Song」에서 에우리디케가 가난한 자신들이 결혼반지와 만찬, 신혼 침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묻자, 오르페우스는 “내가 노래하면 강물이 사금을 가져와 반지를 만들고, 나무가 과일을 떨어뜨려 식탁을 채우고, 새들이 깃털로 우리 침대를 꾸며주겠죠”라 답한다. 현실성 없는 대답이지만 노랫소리로 꽃을 피워내는 오르페우스의 능력과 노래에 담긴 사랑을 확인한 에우리디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후 페르세포네가 돌아온 짧은 여름, 잠시나마 굶주림에서 벗어난 에우리디케는 각박했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늘 생존에 바빠 외로움을 인지하지 못했던 그녀는 오르페우스를 통해 진심 어린 사랑의 따뜻함을 느끼고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가난의 압박에 굴복하고 지하세계로 떠났을 때, 하데스와 계약한 자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절망에 빠져 그리워했던 것은 지상의 온기와 햇볕,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사랑이었다.
여름을 품은 하데스타운
춥고 어두운 겨울을 나는 지상과 달리 하데스의 지하세계는 광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불빛으로 가득하다. 페르세포네는 그 모습을 비정상적이라 여기지만, 하데스는 이를 “당신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지은 것들”이라 표현한다. 이에 일각에서는 하데스가 그토록 지하세계의 개발에 목매었던 것이, 아내 페르세포네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가 사랑하는 여름을 지하에 조성하려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제시한다. 비록 그 광원이 태양이 아닌 전등이고, 전선을 설치하기 위해 수많은 인부가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해야 했지만, 밝고 더운 하데스타운의 모습은 페르세포네가 사랑하는 지상의 여름을 닮았다.
한편, 그리스 신화의 신은 자연 혹은 사물을 수호하는 인격체인 동시에 그 대상 자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하데스’는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지하세계의 이름이기도 하다. 즉 하데스가 지하에 여름을 조성했다는 것은 자신의 안에 여름의 수호신이자 그 자체인 아내 페르세포네를 품었음을 의미한다.
하데스와 오르페우스
“하데스, 그는 나와 같아.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
오르페우스가 노래했듯, 하데스와 오르페우스는 신과 인간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 앞에서 무척이나 닮은 모습을 보인다. 둘 다 연인을 위해 일에 몰두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작중 오르페우스가 그토록 노래를 완성하는 데 집착했던 것은 그 노래로 여름을 되찾아 에우리디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작업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그는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돌아보지 않는 연인에게 지친 에우리디케는 결국 혼자 지하세계로 떠나버린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떠나기 전 그녀의 가방과 옷을 앗아가는 운명의 세 여신은 그녀가 겪은 괴로운 삶을 상징한다. 가난이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끝내 에우리디케를 앗아가는 동안, 오르페우스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하데스 역시 지하세계를 다스리기 위한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아내에게 실망하여 지하의 부유함과 그것을 위해 일하는 자신에게 감사할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때 에우리디케를 발견한 그는 지옥행 기차를 타기 위한 동전을 건네며 지하세계의 풍요를 노래는 자신이 하는 일에 파묻혀 일의 본래 목적이 아내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와 하데스 사이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사랑을 잊어버렸던 과오에도 불구하고 둘 다 자신의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처럼, 하데스 역시 과거 꽃밭에서 페르세포네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오르페우스가 완성한 사랑의 노래 「Epic」은 본래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게 구애하며 불렀던 노래다. “그녀를 안을 때면 세상을 안은 듯, 온 세상이 품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어. 그 기분 말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당신은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지.”라는 가사에서 ‘당신’이란 과거의 하데스를 가리키는 동시에 오르페우스 자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또 다른 이야기, 프시케 설화에서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한 프시케에게 “사랑은 의심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며 떠나버리는 장면이 있다. 신화 속의 많은 인물, 그리고 현실 속의 많은 사람이 의심 탓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곤 한다. 에우리디케는 여름을 되찾아주겠다는 오르페우스의 약속을 의심해 그와 헤어졌고,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의 귀환 약속을 의심해 6개월의 약속을 깨고 아내를 찾아가는 등 그녀에게 집착한 나머지 둘의 사이가 더욱 소원해지는 결과를 맞는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노래 「Epic」에 의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페르세포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 끝에 가을이 되면 돌아오겠다는 그녀의 약속과 함께 페르세포네를 떠나보낸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으로 의심을 극복하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한 시험을 받은 오르페우스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시달리다 지상에 다다르기 직전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다.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던 에우리디케를 발견한 오르페우스는 주저앉아 절망하지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피워냈던 한 송이 꽃을 든 채 지옥으로 가는 열차 속으로 사라진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청혼하며 건넸던 붉은 카네이션의 꽃말,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와 반대되는 결말이다. 에우리디케가 그토록 애타게 자신을 부르던 때에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오르페우스가 마침내 그녀를 돌아본 순간이, 운명의 속삭임에 패배하고 에우리디케를 다시금 잃는 장면이라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를 원전으로 하지만 배경은 20세기 초 미국의 대공황 시대와 유사하다. 작중 인물들의 복장, 「Road to Hell」에서 헤르메스가 말하는 “지금이 힘든 시대라는 걸 꼭 기억해주십시오.”라는 대사가 이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데스타운>은 단순한 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이 아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극의 시작 장면을 반복하며 새로운 운명을 시작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끝난다.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신화 속의 그들과 닮았지만 다른 인물이다. 헤르메스가 노래하는 “오래전 불리던 사랑 노래, 비극으로 끝난 슬픈 노래. 그럼에도 우리 다시 부르리”라는 가사가 이 사실을 암시한다. 헤르메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지켜봐 왔던 것이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 거라 믿는 것.” 그래서 <하데스타운>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까지 되풀이되어 온, 정해진 결말을 반복하면서도 같은 운명을 다시 시작하는 인간의 사랑 이야기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2006년 원작 이후 수많은 개편을 거쳐 2019년 브로드웨이 진출, 2021년 한국에서 최초 공연된 작품이다. 13년간의 공연으로 다져진 작품성에 더해 앞으로 쌓아갈 한국 공연만의 특색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 원전을 모르더라도 인물과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고, 원전을 안다면 각색 전 이야기와 비교하여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으니 돌아올 재연을 놓치지 말고 감상해보자.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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