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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세상을 정면으로 비추다, 뮤지컬 <시카고>

문화

2022. 5. 2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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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살인, 탐욕, 부패, 폭력, 사기, 간통 그리고 배신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감상하시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죠.

감사합니다!

 

뮤지컬 시카고 <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는 사회 풍자 뮤지컬이다. 주인공 록시 하트는 언젠가 스타가 되어 보드빌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가진 삼류 코러스 걸로, 불륜 상대에게 배신당하자 그를 총으로 쏘아 살해한다. 쿡 카운티 교도소에 수감된 록시는 법정 공방을 펼치고 그 이슈를 이용해 보드빌 무대에 진출하고자 한다. 보드빌 무대의 인기스타였으나 살인범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벨마 켈리, 뇌물을 노리는 부패한 교도관 마마 모튼, 황금만능주의 변호사 빌리 플린, 플린과 짝을 이루는 기자 메리 선샤인이 ‘쇼의 도시’ 시카고에서 각자의 이익을 좇아가는 것이 <시카고>의 주된 줄거리다.

 

7명의 살인범

  <시카고>에는 7명의 살인범이 등장한다. 록시 하트, 벨마 켈리, 쿡 카운티 교도소의 5명의 살인범. 벨마가 부르는 오프닝 넘버 ‘All that Jazz’에는 “난 누구의 아내도 아냐, 내 인생을 사랑해”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얼핏 자유로운 독신 여성의 독백 같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벨마는 방금 남편을 죽이고 오는 길이다.

  벨마가 남편을 죽인 이유는 ‘Cell Block Tango’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 넘버에서 벨마를 포함한 6명의 살인범은 자신이 왜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껌 터뜨리는 소리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남편을 총으로 쏘아서, 여섯 명의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연인에게 비소를 탄 음료수를 먹여서, 간통을 의심하며 난동을 피우던 남편이 들고 있던 식칼로 열 번이나 달려들어서, 이웃이 누명을 씌워서, 예술가 연인이 밤마다 자아를 찾으러 나가 자아 대신 다른 여자와 남자를 찾아서. 벨마는 “남편과 여동생이 다리를 벌리고 펼친 독수리 자세를 하고 있더라”라는 말로 살인 동기를 설명한다. 그들이 저지른 것은 명백한 살인이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후회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그놈들이 자초한 일”이고,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살인은 맞지만 범죄는 아니었다”고 노래할 뿐이다.

  ‘Cell Block Tango’의 살인범들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경고 차원에서 총을 쏘았을 뿐인데 머리에 맞았다”라거나 “어떤 남자들은 비소를 먹으면 죽는 모양이더라”라는 식이다. 화룡점정은 간통을 의심하는 남편을 죽인 세 번째 여자인데, “그냥 칼을 들고 있었을 뿐인데 흥분한 남편이 스스로 칼에 달려들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뒤에 덧붙인 “칼에 열 번이나 달려들던데”라는 가사가 진실을 암시한다. 벨마 역시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피 묻은 손을 씻을 때까지도 그들이 죽은 줄 모르고 있었다”며, “내가 안 죽였지만, 설령 그랬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고 뻔뻔스레 되묻는다.

 

황금만능주의 시대

  작품 속 시카고를 움직이는 최고의 힘은 돈이다. 변호사 빌리 플린은 여자를 밝히면서도 의뢰인이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면 즉시 변호를 끊어버리는 냉정한 황금만능주의자다. 때문에 록시는 플린의 의뢰비를 몸으로 때우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에이머스를 통해 자신의 소지품을 경매에 부쳐 비용을 마련한다. 교도관 마마 모튼은 ‘When You're Good to Mama’에서 자기 삶의 방식은 언제나 팃-포-탯(tit-for-tat)이라며, 뇌물만 충분하다면 담배, 기자회견, 석방 그 무엇이든 원하는 걸 주겠다고 노래한다. 작품 속 기자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 헤매는 것은 결국 독자의 관심을 끌어 돈을 모으기 위해서다. 록시와 벨마가 그토록 스타가 되려고 애쓰는 것 역시 돈 때문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보드빌 무대라는 점이 이 사실을 한층 더 강조한다. 보드빌은 노래, 춤, 코미디, 곡예 등이 한데 뒤섞인 통속극으로 한때 큰 인기를 끌었으나 예술의 영역보다는 쇼 비즈니스에 가깝다. 록시는 넘버 ‘Roxie’에서 “나와 관객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쇼 비즈니스죠!”라며 즐거워한다.

 

모두가 부패한 세상에서

  <시카고>는 농도 짙은 풍자극이다. 그러한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는 등장인물의 구성이다. 많은 작품이 일말의 양심으로 고뇌하는 인물을 그리는 것과 달리, <시카고>에는 정상적인 도덕심을 갖춘 인물이 없다.

  7명의 살인범, 속물적인 변호사, 부패한 교도관, 성매매의 대가로 거짓 임신 진단을 내려주는 의사, 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에 혈안이 된 기자들. 멍청하고 존재감 없는 인물로 묘사되는 록시의 남편 에이머스 하트조차 아내를 두고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웠다는 언급이 나온다. 유일하게 죄가 없는 인물은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힌 헝가리 여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중 유일하게 사형당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죄 없는 헝가리 여자는 왜 사형당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쇼를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빌리 플린이 언급하듯 “시카고에서 살인은 쇼”다. 법정 공방으로 이슈를 만들 수 있는 벨마나 록시와 달리 영어를 하지 못하는 헝가리 여자는 재미있는 쇼를 연출할 능력이 없다.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무죄’ 뿐이다. 그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저 망할 무죄 소리는 다시 듣기 싫다.”며 떠나버린다. 변호도, 법정 공방도 불가능한 범죄자. 그녀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쇼는 바로 사형식이다. 그렇게 누명을 쓴 헝가리 여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시카고>에는 비로소 비도덕적 인물만이 남는다.

  <시카고>는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결말을 비웃는다. 권선징악을 위해서는 악역을 심판할 수 있을 만큼 선량하고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카고>에는 그런 선한 권력이 없다. 죄 없는 헝가리 여자를 사형시키고 살인범인 록시와 벨마를 석방하는 데서 알 수 있듯, 심판을 내려야 할 재판장은 이미 부패한 지 오래다. 마지막 넘버 ‘Hot Honey Rag’에서 록시와 벨마는 보드빌 스타로 성공하여 함께 무대에 오른다. 춤추는 두 살인범, 그들을 무죄로 만든 변호사, 무대를 보며 즐거워하는 관객들 누구에게서도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

  <시카고>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결코 허구는 아니다. 원작 연극의 저자 모린 댈러스 왓킨스가 192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실제 살인 사건들을 바탕으로 각색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카고>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황금만능주의자들, 자극적인 기사를 찾아 헤매는 대중과 기자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시카고>에는 관객들의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많다. 감미로운 멜로디에 맞추어 걸쭉한 욕설을 뱉는 벨마, 밴드에게조차 무시당해 정적 속에서 퇴장하는 에이머스, 스타가 될 꿈에 부풀어 기쁘게 노래하는 록시를 보며 관객들은 즐겁게 웃는다. 그 웃음이 멎어갈 때쯤 씁쓸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시카고>는 모두가 부패한 세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디스토피아의 광경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시카고 (2002) 포스터 < 사진 = 네이버 영화 제공 >

  뮤지컬 <시카고>의 이번 시즌은 종료되었지만, 이 작품은 2002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영화를 감상해보자. 다음 공연 시즌을 노려 뮤지컬을 관람하고 영화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대 뒤편을 차지한 밴드와 함께 그 자체로 하나의 쇼를 펼치는 뮤지컬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영화의 보다 다채로운 배경과 화려한 연출도 감상하는 재미가 충분하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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