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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샹크스, 싸움의 끝과 시작은 어디인가

오피니언

2019. 4. 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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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크스가 말하는 '싸움'이란

'싸움', 민주사회의 시작

샹크스, 그는 누가인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내 동료가 되라'고 외쳤던 루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원피스’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원피스'를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은 루피가 어렸을 적 고무고무 열매를 먹고 바다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한 인물이 샹크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원피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샹크스가 루피를 구할 때 괴수에 의해 한쪽 팔을 잃었다는 것과 먼 훗날, 정상결전에서 에이스와 흰 수염이 죽은 후에 "이 전쟁(싸움)을 끝내러 왔다!"는 대사를 외친 인물인 것까지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만화 '원피스'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샹크스를 왜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샹크스가 2차원 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피스>의 등장인물 '샹크스' (C)尾田栄一郎/集英社・フジテレビ・東映アニメーション


때는 바야흐로 2018년 8월 말, DGIST는 과기부의 오랜 감사로 한창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에 관련해 디지스트 신문 DNA에서는 '과기부 감사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기사를 발행했다. 보통 DNA에서 발행하는 기사에는 댓글이 많아도 10개가 채 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해당 기사는 발행 후 무려 49개의 댓글이 달렸다. DGIST의 운영과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그 자리에 샹크스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아니, 태어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샹크스는 다수의 익명 댓글이 논쟁을 이어가는 댓글창에서 태어나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 싸움을 끝내러왔다!”

외침이 무색하게도 그는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 그저 온라인 공간에 무의미한 byte를 남긴 채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자아를 댓글이라는 형태로 DNA 블로그 곳곳에 남겼다. 특이한 점은 다양한 샹크스들의 IP주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DNA 블로그의 불특정 독자 일부가 ‘샹크스’라는 별칭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DGIST 와이파이나 기숙사 와이파이, 개인 모바일 데이터 등 학교 안에서 개인이 활용가능한 IP주소가 다양하기 때문에 샹크스가 1명이 아니라는 확증은 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샹크스의 출현 이후, ‘붉은머리 샹크스’, ‘검은 수염’, ‘흰수염’과 같은 아종이 발생하고 그 아종의 IP주소 역시 동일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수의 독자가 스스로를 ‘샹크스’로 지칭하고 ‘싸움을 멈추기 위해 등장’하는 현상은 DNA 블로그 내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유행인 것이다. (주석: 다수로 추정했지만, 편의상 ‘그’로 지칭한다.)

DNA 기사 댓글란에 등장한 수많은 샹크스들 <DNA 블로그 캡쳐>

‘샹크스가 끝내고자 하는 싸움’은 무엇인가. 나는 샹크스가 출몰하는 기사를 모아 기사가 지닌 성질을 대략적으로 묶어보았다. 샹크스는 2018년에 진행된 국정감사와 관련한 기사에 8번, 정규직 전환 관련한 기사에 2번, 오피니언에 4번, 총학생회 선거관련 기사 2번, 그 외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기사에 남긴 댓글 6번을 합해 총 22차례 등장했다.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스트레이트 기사 등을 제외하고, 기사가 다루고 있는 토픽으로 미루어 볼 때 샹크스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기사에 출현한다. 실제로 그가 등장하는 기사에는 그를 제외한 다른 독자들의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있으며, 기자의 주장이 담긴 기획기사나 오피니언(주석: 기획기사와 오피니언은 기자 개인의 의견을 주제로 서술한 글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의하지 못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에 거의 항상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샹크스가 끝내고자 하는 싸움’은 ‘기사를 통해 유발될 수 있는 독자들의 의견 충돌’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이를 통해, 샹크스가 평화주의자이며 본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가 어떠하든, 본인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인간상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난무하는 21세기 인터넷 문화에서, 샹크스는 DNA 블로그 내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등장한 ‘인터넷 히피’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샹크스의 인간상에 대한 가치평가를 더 깊게 다루는 대신, 그의 ‘행위’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살펴보려 한다. Annemarie Mol은 『Body Multiple』을 통해 존재론적 실체를 어떻게 새로이 정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떤 객체의 실제는 객체를 떠올리는 주체의 다양한 행위와 주체가 가진 입장에 따라 새로이 제정(enact)될 수 있다. 그렇게 제정된 객체는 하나 이상의 실체를 가지면서도 통일된 관념을 공유하는 복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Mol의 이 주장을 샹크스에 빗대어 해석했을 때, 존재하지 않거나 규정되지 않았던 DNA 기사 내의 댓글들은 샹크스를 통해 ‘제정’된다. 즉, 샹크스는 “이 싸움을 끝내러왔다!”는 댓글 한 줄을 통해, DNA 기사 아래에 공유되는 독자의 의견을 ‘싸움’으로, 해당 기사를 싸움을 유발하는 ‘싸움터’로 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인 한 줄 댓글은, 싸움일 뿐인 댓글타래는 멈춰져야 하고 해당 기사가 싸움을 유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기표로 작동한다. 문제는 싸움을 끝내려는 샹크스의 행위가 또 다른 싸움을 촉발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경우다. DNA 기자들 중 샹크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대다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거슬린다’ 등의 의견을 표현한다. 구체적으로는, DNA기자인 본인이 샹크스 출현 약 6개월 전에 쓴 글에도 ‘그 댓글’이 달린 것을 확인하고, 내가 쓴 기사가 한낱 싸움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불쾌함을 느낀 적이 있다. 


기사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기사의 목적은 단순히 사건을 객관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기사는 사건에 대한 기자의 생각과 근거를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독자가 해당 사건을 판단하는 본인만의 기준이 생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단순히 사건의 발발을 전달하는 스트레이트라고 해도, 어떤 사건을 기사로 다루냐에 따라 독자의 가치관 형성과 사건 판단 기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자 시민인 독자들은 신문이나 기사가 지닌 정치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기사를 통해 전달된 내용을 비평적, 창조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댓글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비평적, 창조적 수용’활동의 한 사례다. 글이 갖춰야 할 기본예의와 대화법을 준수한 댓글이라면, 그것이 기사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 해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샹크스를 통해 DNA 블로그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단순히 ‘싸움’으로 치환된다. 즉, 독자의 발전과 사회구성원들의 생산적 토론을 위한 활동은 본래 의의를 잃고 ‘싸움’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뜻과 ‘끝내야만 하는 존재’로 제정되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 존재에 대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정의가 비단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다양한 정체성과 가치관의 교점에 위치한 시민사회의 유일한 개인 각각은 타인과의 대화와 논쟁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가치)투쟁’을 실천한다. 개인의 권리와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투쟁, 즉 싸움은 그 너머의 이상향을 향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샹크스의 댓글은 그를 통해 제정되는 기사에 달린 댓글타래를 지칭하는 객체이자, 댓글이 남겨진 기사를 싸움터로 제정하는 주체로도 작동한다. 사회 내에서 신문과 기사, 새로운 댓글 문화가 갖는 의의를 부정하는 그의 행위를 단지 하나의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기사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싸움을 끝내려는 행위는 싸움을 끝내지 못한다. 댓글을 통해서 화면 내의 싸움은 그칠지언정, 다양한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이 공유되지 못한 채 벽을 쌓아올린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DNA 기사 안에서 더 많은 싸움과 투쟁이 벌어졌으면 한다. 싸움의 시작은 민주사회의 또 다른 시작이다.

배현주 기자 bhjoo55@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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