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혐오 탓에 놓치는 것들
3.1 정신은 평화적 공동체주의
100주년이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되길
어딜 가든 혐오가 보이는 세상이다. 이 강력하게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녹아 들어 있고, 심지어 ‘극혐’까지 남발한다. 가장 흔한 건 역시 젠더 갈등 속에서 보인다. 인터넷에서 성별 간 상호 혐오는 뜨거운 감자가 된 지 오래다. 그들은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란 걸 망각한 채, 서로에게 혐오를 퍼붓는다. 이 혐오 전선에 성소수자들이 낄 자리는 없다. 혐오의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독재 정권을 혐오한 운동권이 사회적 약자를 배제했듯, 혐오는 당장 눈앞의 과제에 급급하여 정작 중요한 질문을 잊는다. 혐오의 함정이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함정이 빠지기 쉬운 이유는 혐오가 쉽기 때문이다. 어떤 부조리를 맞닥뜨렸을 때, 그 원인을 끝까지 분석하는 일은 어렵다. 설사 원인을 알게 된다 해도 해결을 위해서는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야 하기 일쑤인데, 그 규모나 가능성이 두렵기도 하다. 그때 보이는 해결책이 적당히 다른 상대를 찾아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다. 비겁해 보이지 않고, 효과도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쉽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에 대한 쉬운 답은 대개 틀리기 마련이다. 해결을 위해서는 냉정하게 긴 호흡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대학 글쓰기 강의에서 교수님은 ‘글쓰기는 검도와 닮았다. 날카로운 문장으로 한 번에 상대의 급소를 찔러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디 글쓰기뿐 만이랴. 부조리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분노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분노를 가라앉힌 뒤에 마음속에 벼른 날카로운 칼이다.
최근 한일 외교 관계에서도 이런 혐오의 기류가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고, 아직 깔끔하게 청산되지 않았다. 100년 전 일본은 분명히 가해자였고, 우리는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게 오늘날 대일 혐오의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최근 일본을 향한 일부 사람들의 시선은 유감스럽다. 특히 얼마 전 국내 유력 정치인의 발언은 이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타국의 원수를 전범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건 단순히 우리끼리 사이다라고 박수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이건 세련되지 못한 정치다. 누구도 만족하지 않으나 사회를 꾸역꾸역 평화롭게 유지할 대책을 내놓는 조율 감각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우익 세력이 평소 어떻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하기 때문이다.
항일은 역할을 다했고 반일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혐일은 틀렸다. 지금 일본을 향한 관용이나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다만 좀 더 냉정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분노를 쏟아내며 감정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일본의 진정성이란 어떤 건가? 지난 정부들 사이의 협약들을 돌이킬 근거는 무엇인가? 세계적으로는 전범기의 개념이 흐릿한데, 어떻게 욱일기를 논리적으로 거부할 것인가? 동해 표기 역시 일본해 만큼이나 편파적이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들에 차례대로 준비하며 일본을 서서히 외통수로 몰아야 한다. 맹목적인 사고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우리가 혐일 탓에 잊고 있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인가. 해답은 기미독립선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3.1 정신은 반일이 아니다. 민족의 자주성과 그로 말미암은 세계 시민으로서의 평화 기여이다. 그로부터 10년 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동양평화론을 외쳤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독립운동가들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평화적 공동체주의를 혐오로 그르쳐 배타적 민족주의로 계승하고 있지는 않은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원석 기자 janus1210@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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