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기초학부.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이다. KAIST로 떠난 신성철 전 총장은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남은 둥지엔 복잡한 감정만이 남아있다.
11월 2일 오후 9시 KAIST에선 '융합기초학부'(구 4년무학과 트랙) 대학우 공청회가 있었다. KAIST 학생들은 학생들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은 성급한 진행에 우려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다. 융합기초학부는 총장 후보시절부터 예고되어 있던 신 총장의 공약 중 하나였지만, 변화를 직접 겪게 될 학생들 입장에선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DGIST 학생인 필자는 다른 걱정을 한다. KAIST의 융합기초학부 도입으로 DGIST 학생들은 고유한 특징을 잃게 되었다.
▲떠난 자는 말이 없다.
2011년 DGIST의 초대총장으로 부임한 신성철 전 총장은 ‘융복합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6개대학원 전공 신설과 국내 최초 무학과 단일학부를 신설했다. 최신 융복합 연구 트렌드와 급변하는 과학분야 적응을 위한 초석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학부교육 전담교수제, 전자교재 개발, 멘토 교수 제도 등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DGIST는 신성철 총장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한 획이 되었다. 신성철 총장 역시 이 점을 강점으로 내세워 3전 4기만에 KAIST 총장이 되었다.
DGIST에서 초대 총장과 2대 총장을 부임하다 떠난 신성철 총장. 이제는 KAIST의 총장이다. <사진=전자신문 제공>
‘DGIST가 충분히 성공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임기 중반에 DGIST 총장직을 사퇴하는 논란에 대해, 학부생과의 Talk-Talk 콘서트에서 신성철 총장이 했던 말이다. 떠나고 남는 것은 신성철 총장의 자유였다. 학부 첫 졸업생을 목전에 둔 2016년 말임에도 그랬다. ‘KAIST 총장 하려고 간다’, ‘총장님도 DGIST를 많이 좋아하신 건 분명하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렸지만, 떠난 자는 말이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신성철 총장이 KAIST 총장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에게 남은 아쉬운 감정과는 별개로 축하할 일이었다. 당시까지 DGIST 내의 분위기는 그랬다.
얼마 전, 필자는 신성철 총장이 KAIST 후보 시절 내놓았다는 공약들과 융합기초학부에 대한 자료를 보게 되었다. DGIST 기초학부에서 주요하게 내세웠던 시스템이 틀린 그림 찾기처럼 애매하게 바뀐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도전(Challenge), 소통(Communication), 돌봄(Care)’, ‘무학과 시스템’, ‘급진적인 사회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융복합 인재 양성’, ‘기업가 정신 교육’, ‘UTRP’, ‘지도 교수와 멘토 교수’ 등. DGIST 학생이라면 각각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뻔한 이름들이었다. ‘기여와 창의성은 이제 중요해지지 않은 겁니까?’ ‘KAIST엔 URP가 있는데, UTRP는 왜 있는 거죠? UGRP와는 뭐가 다른 건가요?’ 자조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떠나버린 신총장님께 여쭤볼 수 없는 것뿐이었다.
▲”DGIST라고, KAIST랑 비슷한 곳인데요…”
바로 얼마 전에 18학번 신입생 모집 면접이 끝났다. 18학번 신입생을 맞이 하기 바로 직전에 1기 학부생들이 졸업한다. 1기 학부생임에도 선배들은 굳센 들꽃처럼 버텼고, 이제 곧 결실을 거둔다. 대학원에 합격하신 모 선배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신생 학교라고 우리 학생들이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 열심히 하면 학교 대신 나를 먼저 알아주게 되어있어.” 좋은 말씀이었지만 뒤집어 말하면 학교가 큰 도움도, 큰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DGIST를 찾은 것도, 한 학기에 23학점에 달하는 수업들도, 한 학기에 전공서적 한 권을 다 배우는 커리큘럼에도, 선배들이 버틸 수 있었던 큰 이유는 DGIST 기초학부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기숙사 로비가 북적거리는 게 어색하다고 투덜거리는 고학번들의 입에 묘하게 웃음이 걸려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DGIST 기초학부의 심볼. Goal Oriented Active Learning 즉, 능동학습을 뜻하는 약어이다. 카이스트의 융복합기초학부는 어떤 약어를 갖게 될지 궁금하다.
우리 학생들이 신생 학교라는 위험부담을 갖고 있음에도 기초학부만의 매력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찾았던 DGIST다. 이제 신성철 총장님 덕에 기초학부는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KAIST의 막내가 될 것이다. DGIST 학생들이 스스로를 남들에게 소개할 때 하던 말이 '대구에 새로 생긴 대학인데요. KAIST랑 비슷한 곳이에요'다. 학생들은 스스로를 ‘대구의 KAIST’가 아닌 ‘DGIST’만으로 소개할 날을 꿈꾸며 공부해왔다. 하지만 이제 DGIST는 정말로 KAIST와 비슷해질 것이다. 의리 따위를 운운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만 했나 묻고 싶다. 이제 곧 첫 학부 졸업생을 내놓는 DGIST가 설립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KAIST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회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면,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할까? ‘DGIST 기초학부라고 KAIST에 있는 융합기초학부랑 비슷한 과입니다.’ DGIST가 스스로 해결해야할 숙제이지만,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배현주 기자 bhjoo55@dgist.ac.kr
2017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신고리 원전 (0) | 2017.12.31 |
---|---|
[에세이] 90%가 16%가 될 때 (0) | 2017.11.28 |
선배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과학 (0) | 2017.10.22 |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0) | 2017.08.17 |
출연연 정치적 중립 법안 발의… 연구원들 “과학자는 연구 기계가 아니다” (0) | 2017.08.1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