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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호] (에세이) DGIST는 오리를 키우고 있다

오피니언

2017. 4. 10.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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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주

본 오피니언은 작년 2016년도에 특별호 발행시 출판될 에세이였으나, 특별호가 발행되지 않게 되면서 후원(크라우드펀딩) 시작으로부터 약 10개월만에 온라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특별호 미발행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공지를 확인바랍니다.

오리는 경쟁에 능한 동물이 아니다. 물에서 헤엄칠 깜냥은 되지만 물고기에 비교될 실력은 못 된다. 뒤뚱거리며 뛸 때는 재빠른 네발짐승에게 쉽게 따라잡힌다. 날 순 있지만, 독수리처럼 빠르지도 않고 신천옹처럼 멀리 날지도 못한다.

DGIST 학생들도 오리가 되고 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공학까지 많은 과목을 배웠다. 남들 2년 동안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한 학기에 몰아서 배웠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선수과목을 거쳐 배우는 자동제어도 기초 없이 무작정 배우기 시작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잘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노력 부족이 문제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잘못된 걸까?

나에겐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취미 생활이 있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한다. 이런 것들을 다 포기하고 학과 공부에만 매달린다면 학점을 더 잘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DGIST에 입학하지 않았다. 내가 즐기는 일을 하면서, 잘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싶었다. 수많은 개념과 공식, 증명을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을 때마다 생각했다. 즐거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건 쉬운 공부를 원한다는 말이 아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심화 공부다. 우리 학교가 무학과 단일학부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제도를 충실히 보완한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지금은 배워야만 하기 때문에 허겁지겁 쫓아가는 공부의 연속이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1학년 1학기 때는 맹목적으로 주어진 과제를 하고,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그땐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신입생이니까. 적응이 안 되어서 힘들고 공부가 어렵게 느껴지는 거야. 2학기가 되면 힘들지 않겠지.

다음 학기가 되자 수업시간은 주 32시간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힘들어도 되는 걸까? 조금씩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니까 징징거리지 말자. 그런데 일주일 연속으로 과제를 하면서 해가 뜨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남들도 이렇게 힘들게 공부한다고, 내가 이렇게 힘든 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 그해 겨울 방학이 되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때에도 나는 아직 우리 학교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학교가 정해준 커리큘럼을 끝마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대한민국에 그런 대학은 없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갔다. 2학년이 되면서 더는 과제로 밤을 새우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로 밤을 새웠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다 보니 더는 싫어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다. 싫어하는 과목이 있어도 1학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학교에서 시키는 거니까 해야지. 다 우리 잘되라고 하는 걸 거야. 어렵고 싫어도 과제니까 꼭 해 가야지.’ 하지만 2학년이 되고부터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 옆의 친구들도 다 열심히 하는데’ 라는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노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교수님들께서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고 교재를 개발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노력을 탓하려면 시스템부터 제대로 고쳐야 했다.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어야 융복합 인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을 잘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잘못된 바람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자신의 전공을 선택하고 나머지를 포기해서 학점이 낮은 학생. 또는 이것저것 다 열심히 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학생이 되고 말 것이다. 뭐든지 잘하는 슈퍼 인재는 어디에나 있다. 시스템이 실패해도 언제나 극소수의 인재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잘하는 것은 선택해서 전문성을 보유한 채로 다른 분야와 협업하는 학생들이 DGIST가 지향하는 융복합 인재가 아니었나? 이런 학생들은 무조건 많은 학점, 많은 과제, 많은 시수를 통해서 머리에 지식을 욱여넣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학점을 주는 방식’, ‘과제의 양’ 같은 것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이 아니다. DGIST 교육 시스템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던지는 ‘이걸 어디 써먹어요? 이거 왜 배워요’라는 물음의 이면에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옳나요?’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택 불가능한 공통필수 과목, 선수과목 없이는 배우기 힘들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쏟아지는 지식, ‘이건 왜 이래요?’라고 물었을 때 ‘그냥 외워라, 나도 모른다, 그거 필요 없다, 그냥 이 값만 구하면 돼’라고 돌아오는 답들.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대학에서 똑같은 인재를 길러내는 시스템의 실상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가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공부 외의 역량을 키울 시간이 없다. 대부분의 기초학부 3학년 학생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다 같이 힘든데 저 애들은 평점 4.0 넘잖아? 다 노력하면 되는 거야’라는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학교가 보고 싶은 것은 학부를 대표하는 특출한 소수일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우수한 성적을 받는 그들은 물론 존경할 만한 학우들이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가 최선을 다해 책임져야 하는 것은 잘못된 시스템이 만들어낸 DGIST의 오리들이다. 그들이 대다수이다. 반드시 직시해야 할 DGIST의 현실이 바로 그들이다.

해결책이 뭘까? 재수강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 학점을 A-로 올리는 것? 늦었다. 이미 높은 점수를 받고도 학점은 B+를 받은 재수강 학생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이제부터 학점을 잘 주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겪은 고생, 부당한 대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학교는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모든 대학원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어떻게 선택의 자유도 없이 정해진 과목을 듣고 선수과목도 없이 힘겹게 공부했는지를 설명해줄 것인가?

내 생활이 기초학부 3학년 학생들 모두의 생활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힘들든 간에, 확실히 이 커리큘럼은 잘못되었다.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모두가 이 이야기를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었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맞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우리 탓이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잘못된 시스템 속의 톱니바퀴로써 생활했던, 아무 힘도 없었던 우리의 2년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라도 우리가 믿었던 그 이야기, 그 약속을 지켜 달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평균의 학생이다. 학교는 나 같은 학생들에 대한 방안을 찾아주어야 한다. 입학 담당자는 나 같은 학생들이 와야 하는 학교가 바로 DGIST라고 말했다. 나는 다수다. 내가 부족하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우리가 노력을 안 해서 학점이 잘 안 나온 것이고, 그렇기에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고, 틀리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학교를 믿고 따랐던 우리를 탓하는 이들이야말로 부끄러움을 알길 바란다.

황현정 명예기자  roo960728@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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