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합니다~” 한화 이글스의 응원가이다. KBO 만년 꼴찌라는 슬픈 별명을 가진 한화 이글스지만, 그들의 구장에는 그 유명한 "나는 행복합니다" 응원가가 항상 울려 퍼진다. 이글스의 팬들은 팀이 연패를 기록해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고 노래를 부른다. 그 모습이 경기에서 지더라도, 눈물이 흐르더라도, 그래도 행복한 그 위대한 한화 이글스를 만드는 것이다.
한화의 연고지인 대전 지역의 축구팀 구 대전시티즌(현 대전하나시티즌)도 비슷한 처지였다. 최근이야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2010년대 대전은 언제나 하위권에 처져 있었다. 서러울 만도 한 대전의 팬들이었지만, 모든 이들은 대전시티즌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했다. 매 경기 지더라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대전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노래했다. 그것이 스포츠니까. 그러나 2011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K리그 승부조작 사태’ 불법 스포츠 도박 사업을 하는 조직 폭력배들에게 금품을 받은 선수들이 고의로 경기에서 패배했다. 리그 전체의 약 9%에 해당하는 59명의 선수가 이에 가담했고 K리그 자체를 철폐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수사 과정에서 4명의 관련인이 사망했다. 가담자는 모두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당했지만, 이 끔찍한 사건 이후 많은 축구 팬들, 특히 승부조작 가담자가 많았던 대전시티즌의 팬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들에게 승리만을 생각하며 싸워 나가는 선수들의 열정은 최소한의 전제이자 믿음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믿으며 불렀던 응원가의 가치가 갈기갈기 찢어지자 팬들은 더 이상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대전의 미드필더 권집(개명 후 이름 권민준)을 좋아하며 경기를 응원했던 한 초등학생 팬도 그가 승부조작의 중심에서 브로커 역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팬은 이날 이후 다시 경기장을 찾기까지, 다시 자신의 고향팀을 응원할 용기를 얻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12년이 지나고 그 팬은 DGIST에 입학해 학보사 기자가 되었다. 정신없는 학교생활을 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꿈꿔가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승부조작 사건 가담자 48인 포함 축구계 영구 퇴출자 100인 사면!’ 대한민국 남자 축구 대표팀의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 자축과 축구계 대통합이라는 목적을 가진 행동이라는 대한축구협회(이하 축협)의 설명이었다. 모든 범죄는 각자의 끔찍함을 가진다. 그러나 스포츠계에서 승부조작은, 모든 선수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팬은 이들을 응원한다는 프로스포츠의 제일 밑바탕 규칙을 어기는 최악의 범죄이다. 승부조작으로 한국 축구를 망친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이곳으로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축구 팬들이 아는 상식이다.
비통할 일이었다. 승부조작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팬’은, 나를 비롯한 우리 ‘팬’은 용서하지 않은 일을 대한민국 축구계를 이끄는 협회가 해버렸다. 긴급 이사회를 통해 한 시간 만에 이 중대한 사안을 결정해 버린 축협의 상식 밖 행정부터 언론의 주목을 덜 받기 위해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직전에 한 페이지짜리 보도자료를 뿌린 ‘꼼수’까지 축구 팬으로서 화가 난 점이 한 트럭이었다. 대전시티즌을 응원하던 꼬마 팬이 12년 전 입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무기력했다. 축구를 사랑한 팬이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무기력하고 화나게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피켓을 만들고 거리로 나왔다.
화요일 밤에 사면 소식이 발표된 후, 목요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시 마포구에는 축협의 본사 격이라 할 수 있는 축구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침 그날 강의 관련해서 마포구에 방문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올라갔다.
수요일 오후에 1인 시위에 대한 생각을 처음 했다. 무기력하게 앉아있지만 말고 나름의 화풀이라도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여건상 긴 시간 동안 시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내 의견을 강하게 피력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먼저 스케치북을 샀다. 기숙사에 굴러다니는 네임펜을 집어 들고 표어를 적었다. 대단히 멋있는 멘트를 적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머리가 그런 멋진 표현을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내 시위 소식을 알렸다. 나 혼자 축구회관 앞에 몇 시간 서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이렇게 의견을 외치고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에 내 시위 소식으로 릴레이 시위가 짧게나마 진행됐으니, 내 생각이 완전 틀리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대학생 권대현이 내일 정오부터 3시간 동안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 앞에서 승부조작 가담자 사면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이번 사태에 관해 발행된 기사를 모아, 각자의 바이라인(기사 끝에 붙는 기자의 이름과 연락처)에 있는 이메일을 긁어 많은 기자에게 연락했다.
스포츠니어스 김현회 기자와 SBS 이정찬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두 기자 모두 시위를 취재하고 내 인터뷰 영상을 촬영해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시위 전날 밤 10시에 보도자료를 뿌렸는데 이에 응답하고 이야기를 들으러 오겠다는 두 기자의 말에 큰 열정을 느꼈다.
목요일 아침 일찍 기숙사에서 일어나 내 몸만큼 큰 스케치북을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축구회관에 도착했을 때 연락을 받고 와 있던 SBS의 카메라 기자와 인사를 나눈 후, 스케치북을 펼치고 굳은 표정으로 섰다.
마침 직원들의 점심시간이었는지 많은 사람이 축구회관 정문을 오갔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평화로웠다. 동의한다고, 용기 내주어서 고맙다고 외치며 사진 찍어 가는 시민부터, 멋지다고, 우리가 미안하다고 조용히 속삭이고 지나간 협회 직원까지 많은 사람이 내 의견과 행동을 응원해 주었다. 우연히 만난 서호정 기자는 내게 물 한 병을 건네며 고마움을 표하기까지했다.
그러나 반대인 사람도 있었다. 멋진 양복을 입고 회관 건물에서 잠시 나왔다가 나를 벌레 보듯 한 눈빛으로 혀를 끌끌 찬 ‘무언의 비난가 중년 남성’부터, 대놓고 면전에서 욕을 하며 회관으로 들어간 ‘유언의 비난가 청년’도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SBS 이정찬 기자와 스포츠니어스 김현회 기자가 도착했다. 사실 SBS라는 대형 언론사에서 연락을 줬을 때 단순히 한 페이지짜리 인터뷰 기사가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와서 오늘 밤 뉴스에 나갈 영상이라며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당신들이 망치고 있는 한국 축구를 팬들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내가 응원하는 대전하나시티즌의 머플러를 두르고 갔다. 이정찬 기자는 내 목에 있는 머플러를 카메라에 잘 담기도록 고쳐 만져주며 자신이 내지 못한 용기를 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도 기자이기 전에 이 상황에 분통이 터지는 한 명의 축구 팬이었던 모양이다.
카메라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다. 카타르 월드컵의 선전을 이번 사면의 이유로 설명한 협회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월드컵을 응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 후회를 전하며 소심하게 그들을 비꼬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뿐이기 때문에 이렇게 서 있다는 내 속 이야기였다.
내 시위가 끝난 후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축협의 사면 재심의 결정이 내려졌고 다음 날 사면이 전면 철회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 시위에서 파생된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 앞 릴레이 1인 시위도 며칠이나마 진행됐다. 내 시위를 보도한 기사가 모 축구 커뮤니티에서 4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알려지자, 이를 본 다른 팬도 나와 같은 위치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한 것이다.
내 목소리의 영향이 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상황이 며칠 안에 종료되었다. 축협의 수장인 정몽규 회장을 제외한 부회장단, 이사진 전원이 사퇴했다. 화요일에 시작해 금요일에 막을 내린 ‘4일 천하’였다. 아직도 석연치 않은 점은 많다. 사면 결정과 철회 과정 중 그 어디에도 외부인의 의견을 들으려는 노력은 없었던 ‘깜깜이 회의’였다. 또한 축협의 사면 결정으로 인해, 승부조작 가담자 48인에 더불어 선수를 폭행한 지도자, 금전 비리를 저지른 고위급 임원들까지 축구계로 복귀할 뻔 했다는 점도 분노할 만하다.
축구 팬으로서 부끄럽다. 사람들이 K리그, 한국 축구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승부조작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상황이 싫다. 대본이 있는 WWE도 아니고, 프로축구에서 승부가 조작되고 있다는 점을 안다면 그 누가 축구의 팬이 되겠는가. 승부조작을 철폐하려 앞장서야 할 대한축구협회가 이에 가담한 사람을 죄다 사면하기 시작하면 그 누가 이들을 지지하겠는가.
나와 같은 힘 없는 한 명의 축구 팬은 상황이 일단락되는 모습을 본 이후 더 이상의 시위를 진행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며칠 전에도 모 언론 단체의 대표가 나에게 연락해 이번 사건의 공론화에 대해 자문했다. 그들의 처절한 노력이 빛을 발해 축구 팬인 것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불합리한 일이 많다. 과거 승부조작 사건으로 상처 입었던 축구 팬이기에 이번 가담자 사면 사태에 화를 내었던 것이지,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들이 분명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사면 발표가 나오고 시위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이 상황 속에서도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 고통받았다. 이 글을 읽는 DGIST의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길거리로 나가 잘못된 일에 화낼 수 있고, 우리의 권리에 대해 소리칠 수 있다. 거대한 세력의 잘못된 행동을 우리 개인은 막지 못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화풀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계란으로 바위 한 번 쳐보자. 바위를 깨지는 못해도 얼룩 정도는 묻힐 수는 있지 않은가. 한 번 ‘화풀이’해 본, 한번 ‘계란으로 바위 쳐 본’ 선배로서 이야기하자면, 꽤 괜찮다.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것보다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다. 게다가 나의 경우와 같이 운이 좋다면, 계란을 들고 바위 앞에 찾아온 다른 동료들을 만나 결국 바위를 깰 수도 있다. DGIST의 젊은 청년으로서 화나는 일이 생기면 거리로 나가보자. 김현회 기자의 칼럼을 인용하여, 불합리한 일로 고통받고 있는 학우들에게 말하고 싶다. “화낼 수 있으니 젊음이다. 우리는 싸울 수 있으니 청춘이다.”
권대현 기자 seromdh@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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