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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을 쫓는 대중과 부패한 언론 – 뮤지컬 <잭 더 리퍼>

문화

2022. 12. 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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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작품의 줄거리 및 반전 요소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 잭 더 리퍼 >  포스터  < 사진  =  ㈜글로벌컨텐츠 제공 >

줄거리

1888년 런던, 매춘부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가 나타난다. 형사 앤더슨은 사건의 잔인성 때문에 언론의 접근을 막으려 하지만, 기자 먼로에게 마약 중독이라는 약점을 잡혀 기사 독점 거래를 맺는다. 며칠 후 다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난관을 겪던 앤더슨 앞에 살인마의 정체를 아는 청년 다니엘이 나타난다.

다니엘은 장기 이식을 연구하는 미국인 외과 의사다. 그는 7년 전 잭이라는 남자에게 연구용 시신을 받으러 왔다가 그의 수하인 매춘부 글로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글로리아는 잭을 경찰에 밀고하여 그 포상금으로 다니엘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려 했지만, 배신을 눈치챈 잭에 의해 불타는 방 속에 갇혀버린다. 그 사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잭은 총에 맞아 강에 빠져 실종되고, 죽어가는 연인의 그림자를 보며 실의에 빠진 다니엘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7년 후, 다시 런던을 방문한 다니엘은 불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글로리아와 기적적으로 재회한다. 그러나 그녀는 심각한 화상에 더해 매독에 걸려 몸속 장기가 녹아가고 있었다. 다니엘은 글로리아를 살리기 위해 장기 이식을 시도하지만 신선한 장기를 구하는 데 난관을 겪는다. 그때 7년 전 사라졌던 잭이 나타나 신선한 장기를 대가로 살인을 도우라는 거래를 제안하고, 다니엘은 그 제안에 응한다. 그러나 다니엘의 범죄 사실을 눈치챈 글로리아가 절망하자, 다니엘은 잭과의 거래를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앤더슨을 찾아와 진실을 밝힌 것이다. 다니엘은 그날 밤 잭이 살인을 예고했음을 알려주고, 앤더슨은 잭을 체포하기 위해 매춘부 한 명을 미끼 삼아 함정수사를 계획한다.

 

1888년 런던, 그땐 낭만이 있었다

포스터 중앙에 “1888년 런던, 그땐 낭만이 있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음울하고 냉소적인 작품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문구다. 이 문구는 작중 「런던의 밤」에 등장하는, 매춘부와의 밤을 앞두고 흥분한 청년들의 대사다. 1888년 런던의 낭만이란 돈으로 쾌락을 사는 일이 만연했던 시절을 의미한다.

흥분에 젖은 부유한 청년들과 달리, 그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의 웃음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다. 손님이 없을 때의 매춘부들은 미소를 지우고 삶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드러낸다. 그들은 언젠가 돈을 모아 이 생활을 청산할 것이라고 하지만, 하룻밤에 겨우 동전 한 닢을 벌고 그마저 사창가의 여주인에게 빼앗기는 현실을 볼 때 그들의 꿈은 요원해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후반의 런던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인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노동력이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하면서 단순 노동자들은 생계의 위협에 내몰리고 빈곤층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단순 노동자들이 받았던 일당은 약 2실링, 현재 가치로 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이었다. 더군다나 성평등 의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사회는 여성의 직업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에, 빈곤층 여성들은 하녀나 재봉사, 세탁부 등 저임금 노동을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매춘을 겸하는 일이 흔했다. 뮤지컬 <잭 더 리퍼>에 등장하는 매춘부이자 앤더슨의 옛 연인 폴리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없냐는 앤더슨에게 여기에서 살려면 이 짓밖에 없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라며 쏘아붙인다. 당대 매춘부들은 한 번에 약 4펜스(2,500)의 돈을 받았는데,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취침용 나무관을 제공하는 숙박시설의 하룻밤 비용이 4펜스였다. 그 비용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은 2펜스를 내고 ‘hangover’라는 시설에서 줄에 매달려 잠을 잤다. 폴리의 넘버 「버려진 이 거리에」 중 하룻밤에 고작 동전 한 닢, 이틀을 모아야 술 한 잔이라는 가사가 척박했던 그들의 삶을 드러낸다.

19 세기 런던의 저비용 숙박시설 . ( 좌 )  취침용 나무관  ( 우 ) hangover < 사진  = Historic UK  제공 >

이런 빈곤층의 집합소였던 화이트 채플은 자연히 범죄의 온상이 되었으나, 부족한 사회 치안 제도는 이들을 방치했다. 1888년 살인마 잭이 나타나기 전에도 런던 전역에서 빈곤층 대상의 강도 및 살인 사건이 숱하게 발생하였지만,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사회의 보호에서 제외된 그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도시가 싫어

<잭 더 리퍼>의 형사 앤더슨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 인물이다. 도시를 수호하는 경찰이지만 그 성격은 지극히 염세적이고, 삭막한 도시에서의 삶을 비관하며 술과 도박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앤더슨을 대표하는 넘버의 제목이자 작중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그의 독백, “이 도시가 싫어는 실의에 빠진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앤더슨이 처음부터 이러한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다. 폴리와 함께하는 넘버 「아주 오래전 얘기」에서 한때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했던 그의 젊은 시절이 암시된다. 앤더슨은 삶에 지쳐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지만 여전히 옛 연인인 폴리에게 미련을 품고 있는, 나약하지만 인간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앤더슨과 폴리  < 사진  =  ㈜글로벌컨텐츠 제공 >

그러나 폴리와 함께하지도, 그녀를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앤더슨의 우유부단함은 결국 관계의 파멸을 불러온다. 함정수사의 미끼가 될 매춘부를 구하지 못한 앤더슨은 고민 끝에 폴리를 찾아가고, 술에 취한 폴리는 미끼의 표식인 장미를 앤더슨의 선물로 착각해 기뻐하며 머리에 꽂는다. 앤더슨은 그런 폴리의 모습에 망설이면서도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고 돌아가 버린다.

한편 먼로는 잭의 살인 예고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는 앤더슨의 지시를 깨고, 이를 속보에 부쳐버려 함정수사를 망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다니엘은 잭이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진 나머지 폴리를 자기 손으로 살해하고 만다.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온 앤더슨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폴리를 품에 안고 절망한다. 살인마 잭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최후를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폴리는 실제 살인마 잭에게 희생된 최초의 피해자, 메리 앤 니콜스의 애칭이기 때문이다.

 

양심에 고하는 거짓, 잭과 다니엘

거래를 맺는 다니엘과 잭  < 사진  =  ㈜글로벌컨텐츠 제공 >

폴리를 살해하고 연구실로 돌아온 다니엘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잭에게 네가 나타나지 않아서 내가 여자를 죽였다며 항의한다. 그러나 잭은 그런 다니엘을 비웃으며 그가 외면해왔던 진실,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7년 만에 재개된 연쇄 살인의 범인, 부활한 잭의 정체는 다니엘의 또 다른 인격이다. 다니엘은 글로리아를 살리기 위해 직접 매춘부들을 살해해 장기를 얻었고, 그 죄책감을 떠넘기고자 7년 전 죽은 잭을 대신할 인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다니엘의 연인인 글로리아가 매독 환자라는 것, 그리고 매독의 증상 중 하나가 환각을 동반한 정신 이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을 쫓아 연구실에 도착한 앤더슨과 먼로는 모든 진실을 깨닫는다. 다니엘은 글로리아를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지만, 앤더슨은 그런 다니엘에게 너는 그저 살인마일 뿐이라는 일침을 날린다. 설령 연인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해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다니엘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없다.

 

특종, 특종, 특종

앤더슨은 다니엘을 체포하려 하지만, 함께 연구실로 들어온 먼로는 그를 막아서고 다니엘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다니엘의 정체를 숨겨주는 대신 그의 살인사건을 독점 기사로 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경악한 앤더슨은 먼로를 비난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니엘에게 칼을 쥐여준 다음 기사에 쓸 사진을 찍고 넌 이제 슈퍼스타라며 즐거워한다. 먼로는 다니엘과 글로리아의 이야기를 기사에 쓰면 살인마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대중들이 눈물깨나 흘릴 것이라며 기뻐하고, 앤더슨은 그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폴리와 다른 여자들의 죽음은 낭만적인 살인 사건을 장식하는 부속물로 전락해버릴 것이라며 절규한다.

먼로가 이토록 기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돈이다. 그는 앞서 「특종」이라는 넘버에서 살인 예고를 폭로하는 기사를 쓰며 특종감을 구했다는 사실에 춤을 추며 기뻐한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완성된 기사를 코에 대며 향긋한 돈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먼로가 기사를 쓰는 이유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함이며, 이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기삿거리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앞서 앤더슨과 기사 독점 거래를 맺으며 타락의 조짐을 보인 그는 끝내 살인마임이 밝혀진 다니엘과 거래를 시도하며 돈에 인간성을 팔아버린 추악한 면모를 드러낸다. 먼로는 이슈가 될 만한 기사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부패한 언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보여줘, 더 끔찍한 사건

극의 중심 사건인 잭 더 리퍼의 추적 외에 극중 유독 눈에 띄는 묘사가 있다. 바로 연쇄살인을 오락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런던의 시민들이다. 한 술집의 손님들은 연쇄살인마를 희화화하는 「춤추는 살인마」라는 공연을 즐겁게 감상한다. 대중의 요구를 잘 아는 먼로는 「더 끔찍한 사건」에서 자극적인 사건을 갈망하는 시민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인권유린, 전쟁, 화재 사건 등은 재미없다는 그들은 새로운 화제인 연쇄살인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입으로는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는 즐거움이 묻어난다. 곡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그들의 욕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곡의 마지막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잔인해, 재밌어, 보여줘, 더 끔찍한 사건!”

더 잔인하고 자극적인 사건을 보여달라는 대중의 요구를 언론은 충실하게 이행한다. 공감 능력을 잃은 채 자극만을 쫓는 대중과 그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부패한 언론의 콜라보는 가히 절망적이다. 이들이 이토록 살인사건에 무감각할 수 있는 것은, 중산층인 자신들은 매춘부만을 노리는 잭 더 리퍼의 표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매춘부이며 동료들을 잭 더 리퍼에게 잃은 폴리가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회색 도시 시민들의 공감 능력은 빈약하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 대중에게는 오락이 될 수 있다.

「더 끔찍한 사건」 중 먼로와 시민들  < 사진  =  ㈜글로벌컨텐츠 제공 >

<잭 더 리퍼>는 체코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지만 국내에 도입되면서 재창작에 가깝게 수정된 작품이다. 한국의 <잭 더 리퍼>를 완성한 연출가 왕용범은 살인마 잭에 대해 조사하던 중 대중과 언론이 연쇄살인이라는 사건에 상상 이상으로 열광해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살인마 잭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작품에 인용되며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지만, 그런 잭의 이미지 속에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없다. 한때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그들은 이제 그의 잔인함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일 뿐이다. 때문에 잭 더 리퍼 추적이라는 소재에 반해, 극의 주제는 오히려 인간성을 잃은 사회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의 고통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작중 언급되는 회색 도시는 비단 19세기 말의 런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극의 마지막 순간 앤더슨이 내뱉는 나지막한 한탄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과연 흥미로운 살인사건을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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