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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책] 주머니 속 한국 SF ① : 이산화 『증명된 사실』

문화

2020. 3. 27.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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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남은 과제는 사후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물리학을 전공한 이남민 박사를 받아준 곳은 산속의 수상한 연구소뿐이었고, 그 연구소에서 박사에게 준 과제가 바로 사후세계를 물리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연구소는 이남민 박사에게 영혼을 보는 소녀를 동료로 붙여주고 각종 고가의 측정 장비를 제공한다. 현장에 가서 영혼을 관찰하고, 수많은 가설을 검토하며 이남민 박사는 마침내 사후세계를 밝혀내고 충격에 휩싸인다.
-「증명된 사실」 요약

  『증명된 사실』(아작 펴냄)은 동명의 단편소설 「증명된 사실」을 포함, 이산화 작가의 11개의 단편소설을 엮은 SF 단편집이다. 과학기술원을 나온 그의 글에는 과학적 언어들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과학적 언어로 근사하게 풀어낸다.

증명된 사실 표지 <사진 = 아작 출판사>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한 줌 먼지 속」
  당신을 기다리는 첫 이야기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이야기다.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는 다소 심하게 현실적인 이과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폭발사고에서 시작한다. 기형적인 입시구조에서 기형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추리소설의 문법으로 그렸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 모두가 그렇듯이, 이산화 작가의 고등학교와 입시에 대한 원한은 한 추억으로 흘려보낼 만큼 얕지 않다. 이산화 작가가 소설로 풀어낸 그 원한은 “내가 이걸 썼어야 했는데”라는 감정조차 불러일으킨다.
「한 줌 먼지 속」도 그 연장선에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을 그린다. 본 기자와 같이 영재고를 지원했다가 무참히 떨어져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다.

  「지옥구더기의 분류학적 위치에 대하여」
  어느 날 곤충학자 임 교수에게 날아온 메일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물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메일은 그 생물의 분류학적 위치를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관벌레를 닮은 이 생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동료의 동료를 거쳐 전 세계 연구자들이 함께 연구한다. 정체 모를 생물의 샘플까지 받아 각 분야 사람들이 분석하고, 그 정보를 한데 모아 결론을 내리는 과정과 그중에 드러나는 학문적 열정은 아름답다.
과학자를 꿈꿔온 여러분이라면 각계 각 분야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미지를 밝혀내는 이런 낭만을 품어본 적 있을 것이다. 훌륭한 연구논문이 상급자의 엉뚱한 지적으로 망가지는 내용을 담은, 곽재식 작가의 『지상 최대의 내기』 수록작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이 과학 연구의 절망 편이라면 이 단편은 과학 연구의 희망 편을 그린다.

  「햄스터는 천천히 쳇바퀴를 돌린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가? 귀여운 것을 위해 어디까지 낭비할 수 있는가? 이산화 작가는 아마 당신보다 조금 더 낭비할 수 있을듯 하다.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정보기관 요원 C는 딴짓하다가 발견한 햄스터 블로그에 푹 빠진다. 매일 같이 감상하다가 어느 순간 햄스터가 평균수명을 한참 넘겼음에도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키우는 햄스터 돌멩이를 떠올리며 늙지 않는 햄스터의 정체를 파헤친다.

  땅에서 파낸 것 연작
  「무서운 도마뱀」 / 「연약한 두 오목면」 / 「우는 물에서 먹을거리를 잡아 돌아오는 잠수부」 / 「카르멘 엘렉트라, 그녀가 내게 키스를」 / 「희박한 환각」 / 「2억 년 전에 무리 짓다」 / 「공자가 성스러운 새에 대해 말하다」
“예쁜 꼬마선충”이라는 유명한 벌레가 있다. 머릿속에 많은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벌써 소설 한 권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이 붙이는 이름은 그럴듯한 것도 있고 암암리에 이상한 이름 붙이기 경쟁이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이름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재밌는 이름이 많고, 그 이름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생물의 이름은 특히 그 고생물의 모습과 생활을 화석이란 제한된 정보로 상상하며 붙인 이름이라 이름 붙인 과학자들의 낭만이 많이 들어가 있다. 고생물의 이름이 주는 상상을 SF 추리물로, 스릴러로, 로맨스로 풀어낸다. 읽기 전에 미리 이름을 검색하고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이 단편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소재가 된 이름은 실린 단편 순서대로 Dinosaur, Amphicoelias fragillimus, Kairuku waitaki, Carmenelectra shechisme, Hallucigenia sparsa, Rhaetina gregaria, Confuciusornis sanctus이다.
  이 기사에서는 몇 단편만 미리 소개하겠다. 공룡의 영어 명칭 Dinosaur의 의미를 딴 「무서운 도마뱀」은 용을 물리친 기사 설화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한 유서 깊은 성당에서 공룡 두개골 모양의 청동 덩어리가 발견된다. 두개골 중앙에는 마치 창으로 찌른 듯한 구멍이 있었다. 조사하던 고생물학자는 성당을 둘러보다가 최근 학설에 따른 공룡의 모습처럼 깃털이 있는 용과 용을 물리친 기사, 인간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소녀의 모습이 담긴 스테인드글라스를 발견한다. 고생물학자는 그냥 중세의 이야기꾼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재미없는 결론으로 끝내기보다, 좀 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로 한다.
  Hallucigenia sparsa (할루키게니아 스파르사)의 이름에는 환각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소재로 한 「희박한 환각」은 심해에 고립되었다가 만난 지성 생물체와의 사랑 이야기다. 인간과 인간을 전혀 닮지 않은 생명체가 어떻게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을까, 결국 헤어진 두 생물이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이종 간의 흥미진진한 로맨스를 그린다. 작품에 나오는 대사 하나를 인용해본다. “종간 장벽을 뛰어넘을 방법이 몇 가지 있다고 했지? 이젠 수백 가지로 늘었어.”

  단편마다 달린 작가의 후기를 읽으며 작가의 사고를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증명된 사실』의 재미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하므로 감상이 방해될까 걱정된다면 먼저 감상을 적어보고 천천히 후기를 읽는 것도 추천한다.
일상적인 주제, 오컬트적인 주제, 가끔 조금은 과학적인 주제에 과학적 상상력을 더해가며 풀어가는 SF소설이다. 공부나 과제를 하기 전 좀 워밍업이 필요하다 싶을 때, 조금 지쳐서 휴식이 필요할 때, 가볍게 하나씩 골라 읽는 것은 어떨까.

이동규 기자 kinkigu@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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