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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익명성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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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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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 때문일까. 나는 평소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질문을 받을 때도 손을 들기 전 눈치부터 본다. 작년에 수강했던 디자인사고는 내 의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과목이었다. 임진우 교수님은 Symflow를 통해 익명으로 의견을 남길 수 있게 하셨고, 덕분에 나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했다. 다수의 튜터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사용하는 것도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익명으로 글을 쓰면 확실히 부담이 적다.

글쓴이의 사회적 이미지는 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양치기 소년이 수많은 거짓말 끝에 단 한 번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이 늑대로부터 마을을 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는 익명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필자는 때로 글로부터 본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오로지 텍스트만으로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익명성은 글쓴이로부터 글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글로부터 글쓴이를 보호하기도 한다. 이 사회에 나와 상충하는 의견이 많을 때, 권력층이 나와 반대되는 견해에 있을 때 홀로 맞서는 것은 위험하다. 이럴 때 익명으로 글을 쓰면 글쓴이는 안전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물론 나와 같이 괜히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익명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익명으로 글을 쓰면 글쓴이는 자신의 주장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므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

DGIST 학생 대부분은 ‘DGIST 대나무숲에서 익명 글을 가장 많이 접한다. 학생들이 대나무숲 게시글을 즐겨보는 만큼, 대나무숲은 학생들의 화젯거리와 가치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독자는 가면을 쓴 필자가 던진 메시지에 공감하고 때론 분노한다.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고 논란이 이는 게시글은 더욱 힘이 세다. 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글쓴이에게로 옮겨가지만 독자가 아는 것은 오직 필자가 DGIST 학생이라는 것이다. 글의 정황상 필자가 특정 단체에 속한 학생이거나 어떤 동아리 부원일 수도 있겠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독자는 글쓴이를 특정하지 못한다.

대나무숲에서는 종종 논란이 일곤 한다. 예시로 대나무숲에 저격글이 하나 올라왔다고 하자. 당사자는 글쓴이를 특정하지 못하므로 확실하게 반박 의견을 전달할 수 없다. 게시글에 댓글을 달 수는 있겠지만, 익명의 글에 반박하는 것은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법정에 비유하면 원고 없이 피고 홀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격이다. 법원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확실하지 않은 혐의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한다. 반면 글이 가리키는 당사자는 마치 확실하지 않은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럴 때 형법에서는 원고를 무고의 죄로 다스릴 수 있으나, 익명 글에는 원고가 없다. 필자는 익명 뒤에 숨지만, 독자는 고스란히 글을 받아낸다.

말의 무게가 화자의 신뢰도와 책임감을 의미하듯이 글에도 무게가 있다. 필자는 자신의 글에 이름을 내걸면서 내용에 신뢰를 부여하고 동시에 책임도 진다. 나 역시 이 글에 책임이 있다. 반면 익명의 글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감이 없이 글을 쓰면 독자를 덜 신경쓰기 쉽다. 필자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중심적인 주장과 일방적인 비난 등으로 독자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특히 민감한 주제일수록 글쓴이는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익명을 택하기 쉽지만, 독자들은 위험에 노출되기가 쉽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익명으로 글을 쓸 때 실명일 때보다 더욱 신중해야 한다. 앞에서 하지 못할 이야기는 뒤에서도 하면 안 된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메시지를 전할 때는 훨씬 신중해야 한다. 익명의 방패가 필요할 때가 분명 있지만, 방패로 남을 때리면 무기다. 내가 위협받거나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남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이다.

본 오피니언은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휘현 기자 pull0825@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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