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원자력 발전,
2017년에 느낀 민주주의 의의와 한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꺼지지 않는 불을 주었다. 인간은 그 불을 받아 문명을 이룩했다. 통제 가능한 불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따뜻함이고, 어두운 길을 밝히는 희망이다. 하지만 통제 불가능한 불의 위험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최근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에서 보았듯이, 불은 어떻게 쓰냐에 따라 희망과 재앙이 판가름된다. 우리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게 불을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불의 면모는 민주주의에도 대입가능하다. 프로메테우스의 ‘꺼지지 않는 불’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지난 겨울을 따뜻하게 밝혔던 천만 개의 작은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바람 불면 꺼진다는 누군가의 말과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타오르며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나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신고리 원전’에 대한 결정이 민주주의를 차용하여 논란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민주주의의 효용과 한계를 묻는다면, 2017년의 대한민국을 보여주면 될 듯하다. 격동의 한 해였던 2017년은 민주주의의 이점과 함께 놓치기 쉬운 점들까지 우리에게 제시한다. 연말을 보내며 이들을 기억하고 살피는 일은 매우 가치 있으리라 본다.
특히 과학기술원의 언론으로서, 위 사건들 중 신고리 원전 결정을 다루고자 한다. 기자는 이번 12월 초에 한국과학기술학회가 주최한 후기학술대회(장소: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 참석하였다. 주제는 <과학기술과 사회적 의사결정>으로, 신고리 원전 결정의 의의와 한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 글을 통해 학술대회에서 다루어진 내용을 소개하고, 함께 생각해 보는 장을 열 수 있기를 희망한다.
민주주의는 차악을 선택하기 위한 제도이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몇 개월 동안 추위를 무릅쓰고 정의를 외치던 시민들이 승리하던 순간이다. 80년대 민주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10대와 20대는 민주주의의 위력이 이토록 강력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비록 우리의 손으로 선택한 잃어버린 4년이지만, 그를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 역시 우리의 손이다. 올해의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이제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훌륭하다. 윈스턴 처칠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이다. 구성원을 위한 사회라면, 구성원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완전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 등은 일단 논외로 하자) 역사상 히틀러도 민주적으로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다. 민주주의 결과물이 최선이라는 보장은 없다. 항상 차악에 불과하다. 한 사회를 온전히 맡기기에는 무책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번복가능성이다. 선택했던 차악조차 너무 힘들다면, 이를 번복할 수 있어야 한다. 소수집단이 부당하게 큰 목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번복가능하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번복의 역사를 착실히 밟아왔다.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11월 촛불혁명까지. 대한민국의 시스템은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다. 소수의 일탈을 잘 물리친 건강한 모습을 지켜왔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민주주의의 함정을 조심하라.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린 것은 민주주의다.
차악도 악이다
그렇지만 차악도 나쁘다. 사회 운영을 차악으로만 할 수는 없다. 번복의 역사도 좋지만, 그를 통해 잃어버리는 수많은 비용을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옳은가?
특히, 과학에서 이 사안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사회에서 과학적 의사결정은 사회를 크게 좌지우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의사결정의 차악은 다른 무엇보다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이는 번복 불가능할 수도 있다. 원자력 발전 관련 결정이 대표적이다. 이 발전의 지속 여부는 사회에 큰 파급력을 지닌다. 국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을 결정지으며, 환경‧경제 분야의 지배적 요인이 된다. 게다가 결정에 따른 물질적 변화들은 번복이 힘들다.
지난 10월,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재개 여부’가 숙의 민주주의를 통해 재개로 결정되었다. 보통 청와대가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을 따랐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청와대는 공론조사결과에 기초한 위원회 권고안을 따랐다. 공론화위원회는 사안에 대해 중립적인 의사결정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들의 관리 하에 시민참여단 500명을 선발 후 교육하고, 공론조사를 설계하여 의사결정을 진행했다.
아주 첨예한 과학적 의사결정을 일반 시민에게 맡긴 첫 사례이다. 물론 공론화를 시킨다는 취지는 매우 바람직하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건설이 진행되어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공론화에 의한 건설 일시중단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투입된 자본 탓에 의사결정 기회를 미루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앞서 말한대로 과학적 의사결정은 번복이 힘들기 때문에, 번복이 비교적 쉬울 때 고려해야 한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대한민국은 강바닥에 수십 조를 쏟아도 망하지 않는 경제대국이다.
그렇지만 방법적인 측면, 혹은 의사결정구조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앞에서 언급했듯, 과학적 의사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이를 최선이 아닌 차악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식 방법을 차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장 크게 남는다.
신고리 공론화의 의의와 한계
이영희 교수(가톨릭대 사회학과)는 2017년 후기 과학기술학술대회에서 “사회적 의사결정으로서 신고리 원전 공론화의 의의와 한계”를 논하였다. 그가 언급한 의의와 한계는 다음과 같다.
이 교수는 신고리 문제를 단순히 과학적 의사결정 문제로 보지 않는다. 원전은 전문가들 내에서도 논쟁적이며, 기술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윤리 등의 차원이 섞인 복합적 문제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사실 관계가 아닌 가치관 갈등의 문제일 때, 정보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이를 전제한다면 신고리 사안에 한정하여, 기자가 앞서 언급한 과학적 의사결정과 민주주의의 불편한 관계는 대폭 해소된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최근 사회는 신분제로 변질 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전문가주의가 만연하다. 그런 때에 청와대가 공론조사결과 때문에 기존 공약을 뒤집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이토록 강력한 시민주권의 탄생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혁명이 대한민국 시민 권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봐야한다. 이번 사건은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이번 결정의 한계는 분명하다. 우선 시민참여단의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시민참여단은 대표성을 위해 무작위로 선발되었다. 그래도 전 인구를 대표하기에는 표본이 작다. 또한 공론화위원회가 기계적 중립을 고집함으로서 배제된 목소리가 많다. 예컨대, 인근주민과 미래 세대이다. 신고리 인근 주민은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에 시민참여단이 될 수 없었고, 증인으로만 참석 가능했다. 하지만 숙의 과정에서 건설 재개 측 증인이 참석을 거부했다. 중립을 위해서 건설 중단 측 증인 역시 참석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직접적 관계자인 신고리 주민들은 아무런 의견을 낼 수 없었다.
만약 증인으로서 의견을 냈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있다. 다른 문제들은 이성적 이해의 분야인 반면, 신고리 주민의 문제는 시민참여단의 감성적 공감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기계적 중립이 중립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원전의 수명은 60년이다. 이번에 건설하면 60년 뒤 후손들이 뒷감당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고리와 관련하여 청소년 공론화가 따로 진행되기는 했으나, 최종 의사결정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인구통계적 대표성과 사회적 대표성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이번 공론화의 의제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번 의제는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한정되었다. 이 의제만으로는 국가에너지정책이나 원전의 장단점 등 큰 관점을 논할 수 없다. “지역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론화시키기에 부적절했다. 갈등관리 차원에서 이해관계자가 분명할 때는 공론화가 아니라 협상이 더 적절한 해법이다”라고 이 교수는 밝혔다.
공론화위원회 카드뉴스의 일부. 최초라는 점에서 의의는 분명하나,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는 사례였다. < 출처 =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 >
과학적 의사결정에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이 교수의 발표가 마친 후, 타 참석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그 중 가장 뜨거웠던 두 개를 뽑자면 다음과 같다.
▲ 시민참여단은 전문가가 제공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생각한다. 과연 이것이 전문가주의를 향한 도전인가? 숙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참여만 하면 되는 것인가?
▲ 이러한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시민은 원하지도 않은 권력을 떠안게 되었다. 이는 정부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했다. 모든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를 대표에게 위임한다. 이 대표들이 국회의원이며,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여기서 “시민의 목소리를 잘 대변한다”는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작년에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두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성격을 떠나,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이 각각 브렉시트와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모두 사회적 부유층을 대변하는 정치적 결정이자 정치인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계급배반투표는 생각보다 빈번하다. 정보의 부재나 판단 착오 등의 이유로 시민들은 꽤 자주 이익 판단에 실패한다.
그래서 균형 있는 정보 분배가 중요하다, 개인의 판단 능력 향상을 위한 올바른 교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중요성과 별개로, 개인에게 매번 판단과 능력을 강요할 수는 없다. 모두에게 능력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또한 시민은 생계에 종사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직접적 정치참여를 강요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전제인 대의민주주의는 필연적이다.
전문영역인 과학도 그렇지는 않을까. 이해관계로 점철된 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가 아닌, 소통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과학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나올 때도 되었다. 시민들의 요구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전문적으로 검토하여, 구체적인 현실화 방안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인재가 전제된다면 과학적 의사결정에도 민주주의가 꽃필 날이 오리라 본다. 막연한 시민참여단의 숙의보다는 이러한 전문가 양성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잘 해왔다. < 사진 출처 = 주간동아 >
올해 대한민국이 아름다웠던 것은 민주주의 덕분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제도이다. 불이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만들 듯, 성숙한 민주주의는 사회를 널리 이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좋다고 막 휘두르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우리는 많이 고민해야 하고, 그 과정은 험난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왔다. 최근 개봉한 <1987> 영화를 보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냈는지가 보인다. 30년 뒤인 2017년을 보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는지가 보인다. 다시 30년 뒤인 2047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보이기를 희망한다.
최원석 기자 janus1210@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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