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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픈 기억은 잊어버려야 하나요 –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문화

2023. 5. 5.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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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작품의 줄거리 및 반전 요소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중 메리 슈미트와 네 남매 <사진 = 컴인컴퍼니 제공>

시놉시스

1926년 독일의 작은 마을,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와 입양된 네 남매 한스 · 헤르만 · 안나 · 요나스, 그리고 보모 메리 슈미트가 살던 저택에 화재가 일어난다. 박사는 사망하고 저택은 불타는 가운데 메리는 자신은 전신화상을 입으면서 네 아이를 구해내 천사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저택의 화재가 사고가 아닌 방화 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메리는 자취를 감춘다. 사건을 담당한 발터 형사는 메리를 추적하려 하지만,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다는 외부의 우려와 압박에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은 묻힌다.

12년 후, 아이들은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첫째 한스는 변호사, 둘째 헤르만은 화가, 셋째 안나는 교사, 막내 요나스는 출판사 직원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발터 형사가 보낸 그라첸 박사의 수첩을 받은 한스가 동생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묻혀있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아이들은 박사와 메리의 비밀을 좇으며 잃어버렸던 그날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간다.

 

들어봐, 검은 동화책 이야기

12년 만에 다시 모인 네 남매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다. 한스는 성공한 변호사였지만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끝에 술을 마시고 참석한 재판에서 패소해 몰락했고, 헤르만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으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그림으로 대중의 열광과 평단의 조롱을 받고 있다. 안나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하며 강박적으로 조용한 삶을 추구하고, 요나스는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앓으며 작가의 꿈을 잃고 출판사의 좁은 방에서 오탈자 교정에 목을 맨다.

한스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사건으로 재기를 꿈꾸며 12년 전의 사건을 다시 파헤친다. 불안해하며 과거를 외면하려는 동생들에게 한스는 발터 형사가 지난해 가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것이 사건을 덮으려는 누군가의 음모일 것이라고 말한다. 헤르만과 안나는 형사가 보낸 그라첸 박사의 수첩을 읽고 충격에 빠진다. 그 수첩의 정체는 나치당의 비밀 연구일지였으며, 실험 대상은 바로 네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아버지’ 그라첸 박사는 히틀러 총리의 선전 장관 괴벨스의 오른팔이었고, 메리는 박사의 연구 조교였다. 붉은 대저택 실험실에서 진행된 실험의 주제는 ‘최면을 통한 무의식 조정’이었다. 매주 수요일 박사와 메리는 아이들에게 전기충격, 폭행 등의 고통을 가한 후 최면으로 기억을 지웠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둥근 감옥 안에서, 아이들은 수년 동안 매주 수요일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실험 대상으로 살아왔다.

 

침묵하는 수요일 Silent Wednesday

그러나 이 감옥의 벽에도 서서히 균열이 일고 있었다. 아이들은 점차 최면에 내성을 갖게 되었고, 수요일마다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한스는 메리가 먹이던 약을 조사해 그들이 최면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지워왔음을 알아냈고, 동생들에게 술을 먹여 약의 영향을 막은 사이 도망칠 계획을 세우려 했다. 헤르만은 하루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스는 신중해야 한다며 동생들을 설득했다. 다가오는 수요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마지막 수요일의 실험 대상은 안나였다. 그날 그라첸 박사는 의자에 묶인 세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안나를 강간했고, 충격으로 넋을 잃은 안나에게 기억을 지우면 다 괜찮아질 거라며 속삭였다. 그때 줄을 풀고 탈출한 요나스가 분노에 차 박사를 밀쳤고 박사는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요나스를 감싸기 위해, 헤르만은 칼로 박사의 시체를 찌르며 “아버지를 죽인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소리친다. 시체를 앞에 두고 오열하는 요나스와 헤르만, 기절한 채 쓰러진 안나, 자신의 신중함이 화를 불렀다는 죄책감에 절규하는 한스. 네 남매의 마지막 수요일은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돌아가게 해줘,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방문을 열고 기억을 넣어둬, 방문을 닫아 천천히 도망쳐

뒤늦게 나타난 메리는 박사의 시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는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내 천사들에게…”라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메리는 사건을 은폐하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을 탈출시키려 하지만, 헤르만은 이 기억이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한스는 메리에게 자신들에게 최면을 걸어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메리는 그 부탁에 응해 아이들에게 최면을 걸며 기억을 잊으라 속삭인다. 그러나 이미 내성을 가진 아이들은 최면에 빠지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저택에 불을 질러 그 불꽃을 바라보며 최면을 시도한다. 그 시도가 마침내 성공하여 아이들은 하나둘씩 잠들고, 흐려지는 시야 속 마지막으로 보았던 메리의 눈물과 함께 과거의 기억은 막을 내린다.

 

나를 용서하지 마소서

<블랙메리포핀스>는 네 남매의 회상과 암시적인 장면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 특징 때문에 작품의 서사, 특히 메리의 서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박사의 공범이었던 메리가 갑작스럽게 아이들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평이다. 이는 공연 시간이 100분에 불과한 데다 네 남매를 중심으로 극이 서술되면서 메리에 대한 서사가 축소된 탓이다. 그러나 메리와 한스의 대화를 통해 메리가 어떤 인물인지, 그녀가 실험에 동조하고 그 사실을 후회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근사하지 않니? 소수의 고통이 다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게. 상처받은 독일에게 그보다 더 현실적인 구원은 없다고 믿었다.”

왜 자신들에게 실험을 했느냐는 한스의 질문에 메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메리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했고, 그 실험이 조국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실험에 가담했다. 작품의 배경인 1926년 독일은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실패한 쿠데타’, 즉 뮌헨 폭동(1923) 이후 히틀러의 이름과 사상이 전국에 퍼져있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불안과 분노에 들끓던 국민들은 히틀러의 사상에 열광했고, 메리 역시 그 흐름에 동참한 인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난 박사님의 연구를 믿었다. 너희가 정말 모든 걸 잊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어…”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메리의 애정 또한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신뢰를 쌓아 최면을 쉽게 걸기 위해 시작한 보모 역할은 어느새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 있었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 간의 괴리에 괴로워하던 메리는 ‘최면이 아이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며 자기 자신을 세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여가며 실험을 지속해온 결과는 박사의 죽음과 망가져 버린 아이들이었다. 박사의 시체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메리는 그 믿음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얄팍한 거짓말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는가

메리 슈미트는 명백한 가해자다. 그럼에도 작중 그녀가 명백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첫째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며 마지막에 아이들의 탈출을 도왔기 때문이고, 둘째 네 남매가 어린 시절의 안식처였던 메리의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남매는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던 날 엄마가 되어준 사람’으로 메리를 기억한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는 거짓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메리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변호한다.

그렇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이들과 달리 메리와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관객들은 비교적 냉정한 판단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판단에 앞서 우리는 메리가 처해있던 상황 역시 돌이켜보아야 한다. 1891년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란 속에 20대를 보냈을, 나치당이 조국을 구원하리라 믿었을 그녀의 삶을.

혹자는 세상에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사정이 있다 해서 모두가 가해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F. 피츠제럴드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 이 세상 모두가 너처럼 좋은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명심해라”라고 썼다. 남의 사정일 때는 논하기 쉬워도 자기 일이 되면 어려운 법이다. 메리라는 인물은 관객들에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가해자의 사정을 어디까지 참작해야 하는가. 당신이 저 상황에 있었다면, 과연 당신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메리가 아이들에게 가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다. 그러나 그녀는 저택의 시중인 · 사건을 덮으려는 경찰 · 심지어 아이들을 입양해간 부모조차 나치당의 감시자라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유일한 살길을 마련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관객들과 아이들은 메리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 메리가 그녀 나름의 최선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왜 아픈 기억은 잊어버려야 하나요

<블랙메리포핀스>의 키워드는 ‘기억’이다. 그라첸 박사가 진행한 연구의 주제는 최면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과거, 왜 다친 기억은 자꾸 잊어버리게 되느냐고 묻는 헤르만에게 메리는 “아픈 기억은 금방 사라지는 게 좋으니까. 아팠던 기억 남겨둬서 뭐 하려고.”라 대답했다. 자연스레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괴로운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답은 작품 초반 한스의 대사를 통해 이미 밝혀져 있었다. 과거를 외면하려는 안나에게 한스는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잠시 생각나지 않는 것뿐. 머릿속에 시한폭탄을 넣어두고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 괴로운 기억은 잊어야 한다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기보다 ‘잊을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네 남매가 성인이 된 12년 후까지도, 심지어 최면으로 기억을 지운 상태에도 그들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한스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 헤르만이 기괴하게 뒤틀린 그림을 그리는 것, 안나가 긴 원피스에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는 것, 요나스가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겪는 것 모두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들에게 남긴 상흔이다. 박사의 실험이 아이들의 고통을 지워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메리 역시 끝내 아이들의 아픈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졌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회피와 망각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기억을 잃은 채로도 끝내 진실을 찾아낸 아이들 역시 이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네 남매는 다시금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우는 대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기를 택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겠습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무대 위 펼쳐지는 잔혹동화

<블랙메리포핀스> 무대 전경 <사진 = 컴인컴퍼니 제공>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테마는 잔혹동화. 극의 시작을 알리는 넘버 Overture」에서 무대를 가로지르는 흰 천에 비치는 아이들의 그림자는 마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인다. 곡이 끝나는 순간 무대를 가리던 흰 천이 떨어지고 빼곡한 글자로 뒤덮인 벽과 뒤틀린 문을 배경으로 한 회전 무대가 드러난다. 몽환적인 넘버와 인형극 같은 손동작, 캄캄한 무대를 드문드문 비추는 조명이 특유의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인이 된 네 남매가 과거를 회상할 때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목소리도 인상적인 부분이다. <블랙메리포핀스>는 무대 배경이 거의 변하지 않고 조명과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각 장면을 구분하는데, 성인과 아이의 경계를 가르는 목소리의 뚜렷한 변화가 모호함을 지우고 어린 시절과 현재를 명확하게 나눈다.

메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넘버 「메리를 기억해」에는 독일의 동요 「Kuckuck, ruft's aus dem Wald(숲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에서 차용한 멜로디가 삽입되어 있다. 아이들이 자장가 삼아 부르는 밝고 따스한 노래이지만, ‘뻐꾸기가 정신질환자의 속칭으로도 쓰인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이 노래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 혹은 공황장애를 겪는 요나스의 미래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 외에 하늘에서 우산 타고 내려온”, 영화 <메리 포핀스>(1964)에서 차용한 「Chim Chim Cher-ee」 등 작품의 모티브인 메리 포핀스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연출을 한결 풍성하게 해준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포스터 <사진 = 컴인컴퍼니 제공>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결코 가볍거나 마음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극은 아니다. 트라우마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며, 작품 분위기 역시 무겁고 암울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트라우마를 이겨내려는 의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범하거나 특별한 인물이 아닌 그저 성인이 되었을 뿐인 어린아이,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여리고 상처받은 아이들이 그것을 극복해 가는 이야기다.

작사 · 작곡 및 연출을 담당한 서윤미는 이 작품에 대해 관객들이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아픈 기억이 남긴 상흔을 극복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후의 삶에서 그 상처를 극복해 내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관객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만들어가야 할 몫이다.

 

박재영 기자 jaeyoung21@d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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